나의 이야기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친구 양기대에게 보내는 편지
joon mania
2015. 8. 1. 21:08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친구 양기대에게 보내는 편지

http://blog.naver.com/kdyang62/10069825879
그와 나는 금란지계(金蘭之契)를 꿈꾸고 있다.
둘이 합심하면 단단하기가 쇠를 자를 수 있고, 그 향기가 난과 같기를 원한다.
두터운 정을 나누는 벗으로서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관중(管仲)과 포숙(鮑叔) 간의 관계인 관포지교를 능가하는 사이를 만들고 싶다.
그와의 만남은 26년 전이었다. 1978년 전주 노송벌에서였다.
1977년 겨울 전주고등학교에는 마지막 고교선발시험을 위해 경향 각지에서 지학(志學)의 청년들이 구름처럼 달려들었다. 그와 나도 전주벌로 달려왔던 구름 속의 깃털들 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고향은 서해안 항구 군산이었다. 나는 남해안의 항구도시 여수 출신이었다.
촌놈들끼리의 만남 때문이었을까. 우린 가슴으로 서로를 읽었고 그후 어디서나 서로를 필요로 했다.
고교시절 생활은 단조로웠다. 오로지 일류대학 진학을 위해 몸부림을 쳤다. 인생의 목표는 오직 하나 서울대 입학밖에 없는 듯했다. 인생을 논하고 우리의 내일을 그려 볼 정도로 여유로운 마음을 갖기 힘들었다.
뚜껑을 열면 얼음덩이처럼 차가워진 저녁 도시락까지 하루에 2개씩의 밥그릇을 싸메고 다니면서 하루종일 책에 매달렸다.
우리들의 일과는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면 낙오되는 다람쥐 쳇바퀴와도 같았다.
고3으로 올라서면서 입시전선은 더욱 긴장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반장을 맡아 리더십을 발휘했다.
또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을 학급의 친구들에게 먼저 알려준 것도 그였다. 80년 봄 남녘 땅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을 어렴풋이 전해들었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었다. 눈도 막히고 귀도 막혔던 그 시절 흔하던 유비통신도 접하기 어려웠다.
대학생 형을 둔 친구들이 전하는 불확실한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친구들과 눈만 깜빡거리며 궁금증을 쌓아갈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군대가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 치장하더라도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대학시절은 황량했다.
81년 3월 그는 관악산 언덕에서, 나는 신촌골의 무악산 자락에서 각각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약관 스무살은 아직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기에 이른 나이였다. 군사 쿠데타와 광주의 참사를 거치며 권력을 쥔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는 우리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다.
대학 캠퍼스는 사복경찰에게 빼앗겼다. 시대와 역사를 꿰뚫는 책은 금서로 묶여버렸다. 서클활동은 낱낱이 신고를 거쳐야 했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당했다. 정의와 양심은 숨죽이며 엎드려 있었다.
학교 당국에 등록돼 있지 않았던 이른바 ‘언더 서클’에서 얻어 본 금서들은 우리의 가슴에 ‘고뇌의 화살’을 쏘았다. 그때부터 우린 막걸리와 소주잔을 앞에 두고 울분을 토하면서 시대의 아픔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혼자 생활에 익숙했다.
어려움도 혼자 헤쳐 나가고 외로움도 혼자 감내했다. 약관의 나이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중요한 결단도 스스로 내리고 책임도 혼자 짊어진다.
내가 ‘언더 서클’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알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혼자 눈을 떴다.
그는 어느덧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나에게 책을 권했다. 나찌의 지배에 저항했던 대학생들을 그렸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몇 번씩 읽고 나와 밤을 지새며 토론하고 울기도 했다.
대학 1학년 2학기 어느 무렵 그는 느닷없이 어느 공장에 가서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보겠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의 삶이 어떤지 그들의 노동조건이 어느 수준인지 직접 체험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대학생 신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 두려움으로 비쳐졌던 나에게는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그는 과감했다. 한 달여 이상 그는 구로공단의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돌아왔다. 그는 내가 생각만으로 시대의 아픔을 고민할 때 몸으로 느끼겠다고 나섰고 실천했다. 그런 방식으로 대안을 찾으려했다.
대학 1학년을 정리하면서 그는 군 입대를 결정했다. 힘들게 등록금과 생활비를 뒷바라지 하셨던 부모님의 부담도 덜어 드리자는 판단이었다. 무엇보다 병역의무를 빨리 덜어내 앞으로 인생의 진로에서 선택의 폭을 넓히자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해 겨울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카투사에 지원했다. 논산훈련소를 거쳐 자대배치를 받기 전에 거쳐야 하는 평택의 교육부대에서 그는 ‘사고’를 쳤다. 부대 배속 기준으로 삼는 시험을 백지로 제출했던 것이다.
미군 부대 생활로 영어도 배우고 다소 편하게 군대생활을 하겠다며 선발시험을 거쳐 택했던 카투사를 스스로 내던지겠다는 것이었다. 카투사의 실상을 모른 채 들어왔으나 대한민국 남자라면 국민의 군대에 가서 당당히 군복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았다.
그래도 미군 측은 곧바로 그를 한국군으로 보내지 않았다. 처음 배속받은 곳은 판문점 자유의 다리. 그때부터 2년 가까운 그의 험난했던 카투사 생활은 시작됐다. 이어 동두천 보병 부대를 포함해 수없이 이어진 전출 과정에서 그는 미군들의 카투사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지적했고 대한민국 청년들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위계질서와 명령이라는 획일적인 환경 속에 그의 외로운 항거는 힘든 싸움이었다. 면회 때마다 미소를 잃지 않으며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조치에 대해 정당한 요구를 했을 뿐이다. 언젠가 내가 젊은 시절을 돌아볼 때 떳떳한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그는 결국 상병시절 카투사에서 한국군 부대로 전출됐다. 당당하게 요구했던 결과였던 만큼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고 말했다.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고 때로는 일방적인 공세도 당했다. 그렇지만 그는 외롭고 힘든 길을 당당하게 걸었고 부끄럽지 않은 길을 택했던 것이다.
85년 대학에 복학한 그는 한층 성숙한 모습이었다. 군대라는 집단생활에서 조직문화를 배웠고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도 몸에 익혔다. 숨막히는 사회의 분위기와 보이지 않는 개인의 미래를 핑계로 대학원 진학이라는 도피처를 택했던 나와 달리 그는 사회 진입을 위한 현실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그가 택한 징검다리는 기자였다. 신문기자로서 사회 정의와 인권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자임했다. 신림동 자취방과 도서관을 오가며 준비했던 기자 시험은 그가 웅비를 위해 내공을 쌓은 기간이었다.
기자를 택했던 그의 변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지 못한 빚을 갚겠다는 것이었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5공시절 민주화를 위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데 대해 느껴온 자괴감을 바른 글을 씀으로써 덜어내고 마음의 빚을 갚겠다는 얘기였다.
그는 기자시절 권력의 비리와 성역에 가차없는 비판의 칼을 들이댔다. 기자가 되겠다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했다.
그에 이어 나도 신문기자의 길을 택했다. 나의 진로 선택은 그의 영향이 가장 컸다. 대학원 을 마친 뒤 실업자였던 나에게 그는 기자의 길을 강력히 권했다. 경찰서 출입기자였던 그와 하루 내내 취재현장을 다녀보기도 했다. 그의 권유와 나의 선택으로 이젠 나 역시 언론인으로의 생활을 보낸 지 16년째다.
기자로서의 그는 나에게는 사표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특종제조기라고 할 정도로 대한민국 최고의 특종기자가 됐다. 게다가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는 그는 기자사회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목표를 정하면 숙고 끝에 과감히 승부수를 던지는 데 익숙했다. 어려운 결단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그는 항상 앞장서서 몸으로 보여줬다.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때로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융화를 위해 몸을 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제 그는 변신을 꿈꾸고 있다. 언론인 양기대에서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그렇지만 눈앞의 난관과 애로가 있더라도 변함없이 옳음을 쫓아 실천하는 그의 모습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는 아직도 나에게는 우직한 촌놈이면서 굽힐 줄 모르는 기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