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한국版 `행크-벤-팀` 어디 있나 (2014.9.16.)
리먼사태 상처 美선 봉합돼
우린 정책자금으로 메우다
부실폭탄 이제사 속속 터져
2008년`데자뷰' 떨칠수 없다
9ㆍ11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9ㆍ15다.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기디온 래치먼이 그렇게 주장했다.
9ㆍ11은 2001년 알카에다에 의한 미국 월드트레이드센터 테러다. 9ㆍ15는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이다.
월가에서 벌어진 `그들만의 일`이니 와 닿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세하게 따져보면 9ㆍ15의 여파는 아직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2008년 몰아친 초대형 쓰나미는 참혹한 상처를 남겼다. 5개 투자은행 가운데 3개(베어스턴스 리먼브러더스 메릴린치)가 사라졌다. 살아남은 2개(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는 업태를 바꿔야 했다. 최대 보험회사 AIG는 국유화됐다.
미국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제로까지 내리고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살포하듯 유동성을 풀었다. 미국 재무부는 도쿄 서울 상하이 홍콩의 동아시아 금융시장 동요부터 막기 위해 매주 일요일 오후 시장안정대책을 내놓았다. 그즈음 워싱턴DC에서 특파원으로 일할 때 촉각을 곤두세웠던 기억이 역력하다.
`행크ㆍ벤ㆍ팀` 삼총사가 총대를 멨다. 헨리(행크) 폴슨 재무장관, 벤저민(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티머시(팀) 가이트너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다.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팀이 행크 자리를 이어받았다. 막후 조력자가 하나 더 있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이다. 미국 중앙은행 설립의 밑그림을 그린 1910년 `지킬섬의 음모` 때도 JP모건의 실력자 헨리 데이비슨이 함께했던 것처럼 미국 금융 역사의 변곡점에 JP모건은 빠지지 않았다.
9ㆍ15 이후 대마불사(too big to fail) 신화는 무참히 깨졌다. 대마구제불능(too big to save)이 더 맞는다는 걸 보여줬다. 부실 덩어리 공룡 금융사와 기업에 혈세를 투입하고 공권력이 개입해 떠안아서는 안 됐다.
2008년 금융위기 후 한국 경제도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렇지만 별 희생양 없이 넘어가는 듯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보 삼미 기아차 대우로 이어지는 부도 행진과는 달랐다.
이명박정부 후반과 박근혜정부 첫해 소문만 무성했을 뿐 아무 일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고 있다. 정책자금으로 기업 부실을 메워 버텨오다 한계에 도달했다. STX그룹이 손을 들었고, 동부는 아직도 살얼음판 위를 걷는다. 조 단위 정책자금을 대출받아간 제조업체가 여럿 더 생사의 기로에 있다.
따져보면 시간문제였다. 부실 덩어리를 도려낼 생각은 하지 않고 정책금융기관에서 껴안고 일단 덮고 넘어가는 건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내 임기 중에 터지지 않게 덮어놓고 미뤄두면 문제가 사라지는 건가. 곪은 종기를 도려내지 않으면 잘라내야 하는 부위가 커지는 건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생리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신제윤 금융위원장에게 공이 넘어갔다. 홍기택 산업은행장과 이덕훈 수출입은행장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잘라낼 건 정리하고 팔아치울 건 빨리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지난주 달러당 엔화값이 6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각국 경제 정책이 부딪친 통화전쟁의 결과다. 미국 연준은 10월에 양적 완화를 종료하고 금리 인상 시기를 앞당길 태세다. 유럽중앙은행(ECB)은 기준금리를 0.05%로 내렸다. 추가 부양 조치로 제 살기에 바쁘다. 일본은행도 다음달 추가 양적 완화를 단행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달러 강세와 엔화 약세는 필연적이다. 2008년 말 수준으로 돌아간 엔화 환율 하나만으로도 그때의 데자뷔를 떠올린다. 각국이 제각각 위기를 어떻게 수습했고 성공했는지 판단하긴 아직 이르다. 확실한 건 2008년 이후의 위기가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도 총대를 메고 앞장서는 삼총사가 필요하다. 한국판 `행크ㆍ벤ㆍ팀`은 지금 어디에 있나. [윤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