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죽은 자는 말이 없다?(2015.4.14.)
[매경포럼] 죽은 자는 말이 없다?(2015.4.14.)
성완종 리스트 폭발력은
대선자금 관련 여부 때문
박대통령이든 검찰이든
법과 원칙 강조론 부족해
제대로 규명할 결기 보여야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을 보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소설 제목이 먼저 떠올랐다.
오스트리아 극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1893년 발표한 단편 소설에서 쓰인 제목이다.
정작 유명해진 건 헤밍웨이 덕분이다. 1942년 헤밍웨이는 전쟁 속 인간의 모습을 그린 본인과 여러 작가의 글 42편을 모아 두 권으로 엮으면서 1권의 제목에 이것(Dead men tell no tales)을 달았다. 2권의 제목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였다.
역사에서는 승리자가 패배자의 기록을 지워 버리거나 왜곡하면서 사실상 입을 닫게 만들었다. 싸움에서 지면 말 없는 죽은 자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성완종 전 회장이 거론한 인사들에게 왜 돈을 줬겠는가. 사적인 관계로 준 뇌물이라면 관심을 가질 가치도 없다. 핵심은 대선자금이다. 2007년 한나라당 당내 경선과 2012년 대통령선거 본선 때 박근혜 후보 측에 건네진 돈이다. 중앙선관위에 신고된 내역엔 2007년 총수입지출 16억원, 2012년 선거비용 479억원으로 돼 있다.
성 전 회장이 줬다고 주장하는 돈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받은 걸로 적시된 창구 누구도 손사래 치며 부인하기 때문이다. 본격 선거운동 전에 줬고 공식적으로 회계처리되지 않았을 정황을 점친다.
성완종 리스트 수사가 제대로 갈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에 달렸다고들 말한다. 박 대통령은 정면으로 돌파해야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는 해답을 알고 있는 듯하다. 박 대통령은 그저께 "검찰이 법과 원칙에 따라 성역 없이 엄정히 대처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어제 청와대 관계자는 측근이든 누구든 검찰 수사에 예외가 없고 그 과정에서 비리가 드러나면 엄정하게 처리하면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을 붙였다.
2003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차떼기 대선자금 수사 때 함께 불똥이 튀자 최측근 안희정 씨를 감옥에 보낸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주말과 휴일 사이 온 나라가 들끓자 일요일 오후 5시 20분께 청와대 대변인의 서면 브리핑을 통해 나온 대통령의 간접화법식 의지 표명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읽지 못한 듯하다.
엉뚱한 제안일지 모르지만 모레부터 시작되는 박 대통령의 남미 4국 순방을 미루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라 안에서 이른바 국기를 흔들 만한 폭탄이 터져 있는데 대통령이 바깥에 나가 돌아다녀 본들 국민의 박수를 받기는 힘들 거다.
언론이 대통령의 순방 성과를 전해 봐야 누가 관심을 갖겠나. 12일간 대통령이 나라를 비운 사이에 성완종 사건이 정리될 수 있다면 모르지만 요원하다. 박 대통령이 외국 순방까지 미루는 결기를 보여 준다면 이번 사태를 제대로 풀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기자 시절 청와대를 출입해 봐서 정상외교의 중요성을 잘 알지만 어느 나라 정상이든 내치에 부득이한 상황을 맞으면 비록 확정했더라도 외국 방문을 조정한다. 내치와 외교를 맞비교할 수야 없으나 득실을 따져 보고 손해 보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게 현명한 정치가 아닌가.
죽은 자에게서 나올 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성 회장은 다르다. 죽기 직전 경향신문과 했던 50분간의 생생한 인터뷰가 있고, 55글자로 채운 자필 메모가 있다. 적시된 이들이 아무리 손사래 쳐봐야 시중의 여론은 싸늘하다.
이쯤되면 표현을 바꿔야겠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에서 `죽은 자는 알고 있다`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로라 리프먼의 추리소설 `죽은 자는 알고 있다`는 유괴, 교통사고, 실종사건으로 이뤄지는 과거와 현재 속에서 진실을 좇는 시간여행을 담았다.
작가는 소설에서 `왜?` `어떻게?`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진다. 종착점은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다.
미적대던 검찰이 지난 일요일 특별수사팀을 꾸려 나서겠다고 했다. 일단 검찰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특검 운운하지만 성급하다. 검찰이 먼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 하지 말고 진실을 내놓아 보라.
[윤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