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靑 서별관회의서 꿰차라 (2015.11.24.)
[매경포럼] 靑 서별관회의서 꿰차라 (2015.11.24.)
YS말기 시작된 뒤 역대 정부마다
경제위기때 주요 결정 담당했다
요즘 최대현안 한계기업 구조조정
장관.수석 바뀌어도 변함 없도록
힘 실린 협의체서 끌고 나가야
타계한 김영삼 전 대통령 하면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가 먼저 떠오른다. 하나회 척결이나 전두환, 노태우 구속처럼 배짱만으론 해내기 힘든 일이었다. 민감한 경제정책이니 부작용과 후유증을 면밀히 따져야 했다. 그런데 그는 밀어붙였다.
YS정부 때 시작한 의미 있는 일이 또 있다. 청와대 서별관회의다. 본관 서쪽 회의용 건물인 서별관에서 열려 이렇게 불렸다. 1997년 위기의 전조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자 경제팀 내 막후 협의가 많아지며 생겼다. 경제장관들과 청와대 경제수석, 한국은행 총재 등이 함께했다. IMF(국제통화기금) 관리하에 들어간 김대중정부에서는 대우그룹 정리, 제일은행 매각 등 굵직한 현안을 여기서 정리했다. 노무현정부 때는 아예 정례화했다. 거시경제정책협의회로 성격도 굳어졌다. 서별관회의가 일반에 알려진 건 2002년 10월 대북송금 청문회 때였다. 엄호성 한나라당 의원이 대북 지원을 여기서 협의했다고 공개해버렸다. 이명박정부 들어선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후 매주 화요일 정례회의 외에 긴급 사안이 터지면 수시로 소집됐다. 금융위기 컨트롤타워 역할을 서별관회의가 맡았다.
2008년 10월 초 과천청사에서 국정감사를 받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오찬 약속을 내세우며 감사장을 빠져나간 적도 있었다. 야당 의원들의 항의를 받아가며 간 곳은 서별관에서의 도시락회의였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롭던 금융시장 대책을 조율하기 위해 경제장관들은 당시 거의 매일 서별관에 모였다.
정부가 해운업계 1, 2위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합병을 추진한다는 한 매체의 보도는 여러모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와 새로 부임한 해양수산부 장관이 각각 부인했다. 구조조정협의체는 시장 원리에 따른 자율적 구조조정을 추진한다고 교과서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그래도 반가웠던 건 이런 검토를 하는 청와대 서별관회의가 가동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요즘 최대 현안은 한계기업 구조조정이다. 이른바 좀비기업 정리다. 경기 침체로 수요는 줄었는데 공급 과잉에 허덕이는 산업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기업활동으로 끌어다 쓴 빚의 이자도 못 갚는 좀비기업을 솎아내야 한다. 금융위원회는 연말까지 대기업 계열사의 신용위험도를 재평가해 구조조정 대상을 좁혀가겠다고 했다. 제대로 심사를 벌여 봐야겠지만 수술대에 올려야 할 대기업이 250개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이다. 상반기엔 최종적으로 35개에 그쳤으니 이땐 엄격한 잣대를 대지 않았거나, 그사이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됐거나다. 금융감독원은 이달 초 중소기업 신용위험 평가 결과 105곳을 퇴출시키고 70곳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으로 경영정상화 과정을 밟도록 했다. 작년엔 125곳이었는데 한 해 사이 40%(50곳)나 늘어났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기회만 되면 부실기업을 조속히 처리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조선, 철강, 해운 등 구체적인 업종을 적시한다. 경제 전체에 끼치는 영향이 큰 데다 그대로 두면 정상기업에도 부담이 된다는 논리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같은 국책은행뿐 아니라 시중은행들도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대출을 늘려가며 이젠 자신들의 부실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수출입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10.5%로 일반 은행의 평균(15% 안팎)에 크게 못 미치니 심각하다.
일각에선 정기국회 예산안 처리를 끝내면 정치판으로 돌아갈 최 부총리가 기업 구조조정을 강조해 봐야 누가 믿겠느냐고 비아냥거린다. 대상 기업 경영진이나 노조의 반발이 거셀 텐데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부가 총대를 멜 수 있겠느냐고 한다. 이런 얘기를 덮으려면 최경환 개인이 아닌 정부 내 영속적 기구가 담당한다는 신뢰를 줘야 한다. 그 일을 서별관회의에서 꿰차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보여 주면 좋겠다. 좀비기업을 가시적으로 정리할 때까지 구조조정작업은 서별관회의에서 챙기고 있다는 걸 천명하라. 그러면 경제부총리가 바뀌어도 경제수석에 새 인물이 와도 기조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국민과 시장은 믿어 줄 거다.
[윤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