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정담

[필동정담] 목멱산 기슭 남촌 (2016.01.13.)

joon mania 2016. 1. 13. 10:08

[필동정담] 목멱산 기슭 남촌 (2016.01.13.)

 

인왕산 중턱에 있는 선(禪)바위 안내문에는 조선의 새 도읍 한양 설계를 둘러싼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충돌이 그려져 있다. 스님이 장삼을 입고 참선하는 듯 보이는 성스러운 바위를 성 안으로 하느냐, 성 밖으로 하느냐 경계 획정을 둘러싼 대립이었다. 성 안으로 넣으면 불교가 왕성해 유신(儒臣)이 물러날 것이요, 밖으로 내놓으면 승려가 맥을 못 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승자는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한양을 유교 국가의 이상과 원리를 구현한 계획도시로 만들었다.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중의 5부로 나누고, 4대문과 4소문을 통해 도성의 안과 밖을 구분했다.

도성 안은 신분계층과 재산에 따라 삶터가 달랐다. 경복궁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지역에는 권세가들이 살았다. 종각을 기준으로 북촌으로 불렀다. 하급 관리와 가난하거나 몰락한 양반은 목멱산(지금의 남산) 기슭에 살았다. 북촌에 대비해 남촌으로 불렀다. 호택반촌 빈가목멱(豪宅班村 貧家木覓)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권세가의 호화 주택은 반촌에 있고, 가난한 선비의 집은 목멱에 있다는 의미다.

박지원은 열하일기 속 허생전에서 허생을 남촌의 전형적인 가난한 선비로 그렸다. 두어 칸 초가집에서 아내가 바느질품을 팔아 입에 풀칠하면서도 책만 좋아했던 허생은 먹절골 은행나무 고목 아래에 살았다. 남촌 선비들이 북촌 권세가의 부정부패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유배를 보내기도 하자 `남산골 샌님이 자기 벼슬은 못 챙겨도 다른 이 벼슬 뗄 재주는 있다`는 속담이 생겼다.

경복궁 왼편 서촌은 역관이나 의관, 화원 등의 거주지였다. 조선시대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가, 근현대엔 화가 이중섭과 시인 윤동주 그리고 이상이 서촌에서 살았다.

남촌엔 일제강점기 후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는데 광복 후 자산가들이 이들의 가옥을 사들였다. 이병철 삼성 회장과 박용학 대농 회장의 자택이 한때 남촌에 있었다. 이후 출판·인쇄 업체들이 차지하며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요즘 남산 아래 장충동과 필동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맛스러운 음식점과 외양에 멋을 한껏 낸 찻집이 늘어난다. 빌딩숲과 아파트촌에 둘러싸인 강남 쪽에서는 느끼기 힘든 정취다.

서울식 ㄷ자형 기와집과 전통 한옥을 찾아 옛 향취를 즐기려는 이들이 서촌과 북촌을 많이 찾는다. 서촌이나 북촌뿐만 아니라 남산 기슭 남촌에서도 역사와 자연을 접해 보시길.

[윤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