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컬럼

[매경포럼] 양적완화인가 구제금융인가 (2016.5.12)

joon mania 2016. 5. 12. 08:59
[매경포럼] 양적완화인가 구제금융인가 (2016.5.12)

韓銀 발권력 써도 특정산업 지원이면
구제금융이니 국회 동의 반드시 거쳐야
2008년 美하원에선 부결 사태도 겪었다
기재부.한은에만 맡긴채 나몰라 말고
상임위.청문회서 따진후 혈세 집행하라


       

거창한 논쟁으로 이어질 듯하던 한국판 양적완화는 한 방향으로 좁아졌다.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 한국은행이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느냐다. 기획재정부가 추가경정예산을 더 확보해 맡을지, 국채를 발행할지 등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필요한 실탄을 마련한다는 명분에 한은은 밀려버렸다. 발권력을 동원해 돈을 대는 건 기정사실이고 대상 국책은행에 출자를 하느냐 아니면 대출 형태냐로 모아진다.

기재부와 한은이 거론하는 미국의 2008년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 처리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했던 시절이다. 미 재무부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함께 7000억달러 공적자금을 조성해 글로벌 금융위기 뒤처리에 나섰다. 파산에 몰린 금융회사에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민간 부문인 주택 관련 업체와 대기업인 자동차업체까지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2008년 9월 15일 리먼브러더스 파산 결정 후 금융위기가 닥치자 미 재무부는 5일 만에 TARP 초안을 내놓았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과 벤 버냉키 FRB 의장은 발이 닳도록 찾아가 의원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하원은 9월 29일 구제금융안을 부결해 버렸다. 주식시장은 9·11사태 후 가장 큰 폭으로 곤두박질쳤다. 퇴임을 4개월 앞둔 조지 부시 대통령의 레임덕을 감안해도 충격이었다. 여당인 공화당 의원들의 압도적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월가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쏟아진 영향이었다.

하원이 발목을 잡자 상원이 나섰다. 구제금융법안을 약간 수정해 하원에 앞서 10월 1일 통과시켰다. 관행으로는 법안을 하원에서 먼저 통과시키면 상원이 뒤따르고 합동조정위에서 단일안을 만들어 조율 후 다시 표결하는데 이번엔 원로원 성격의 상원이 순서를 바꿔 성사시킨 것이었다. 하원도 이틀 후 수정안을 재표결해 통과시켰다.

구제금융안이 의회 동의를 얻자 재무부와 FRB는 신속하게 세부 조치를 실행했다. 7000억달러 가운데 대통령의 서명만으로 즉시 쓸 수 있는 1차분 3500억달러를 재무부는 불과 77일 만에 집행했다. 중앙은행 역할은 그다음 단계부터였다. FRB는 그해 12월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낮추고 단기자산유동화증권프로그램(TALF) 같은 조치를 내놓았다. 학자금 대출, 자동차 할부금융, 신용카드 대출 등 당시 위험하다고 여겨졌던 기초자산으로 발행한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담보로 인정해주고 대출을 해준 프로그램이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민간 부문 부채의 위험도를 낮춰준 것이다.

하원의 몽니로 요란을 떨었지만 의회는 구제금융안에 동의해준 뒤엔 청문회를 열어 지원받는 금융회사와 대기업을 철저하게 혼냈다. 2008년 11월 열린 자동차업체 청문회에서 GM, 포드, 크라이슬러 경영진은 혹독한 심문을 당했다.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청문회에 왔던 릭 왜거너 GM 회장은 질타를 당한 뒤 결국 사임했다. 구제금융을 받은 AIG와 씨티은행 경영진의 부도덕한 고액 보너스 잔치는 청문회에서 도마에 올랐고 끝내 토해냈다.

지금 우리가 추진하는 해운·조선 한계기업 구조조정과 그를 위해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 혈세를 투입하는 조치는 누가 뭐라 해도 구제금융(Bailout)이다. 분명한 구제금융을 왜 한은의 발권력에 의존해 양적완화라고 포장하려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구제금융에는 재정당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먼저 하고 중앙은행의 후속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원활한 정책협조가 필수다.

무엇보다 구제금융을 위해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 되는 과정은 국회 동의다. 그것이 국민적 합의다. 혈세를 지원하려면 금융회사든 민간기업이든 부실을 초래한 책임을 확실하게 먼저 물어야 한다. 청문회도 열어야 한다. 끝물이라도 19대 국회에서 당장 시작해야 한다. 구조조정에 한시가 아까운데 손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20대 국회는 벽두부터 이 일을 이어받아야 한다. 정부, 국회, 중앙은행이 모두 나서야 할 일이다. 2008년 미국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배운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