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정담

[필동정담] 삼베 수의(壽衣)(2018.11.27)

joon mania 2018. 11. 28. 13:49

[필동정담] 삼베 수의(壽衣)(201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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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한 탓이지만 요즘 장례 문화에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배의 잔재가 많다는 주장에 놀랐다. 상가에서 접하는 삼베 수의, 영정 사진, 유족 완장, 국화꽃 장식 등 복장과 장식이 조선총독부의 강제로 생겼고 이후 자리를 잡아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전통의상 전문가 최연우 교수에 의하면 조선시대 돌아가신 이를 염습(斂襲)할 땐 비단이나 명주 등 최고의 견직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성종 때 지은 국조오례의에 있는 기록이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 11월 내린 의례준칙을 통해 삼베 수의를 강제했다. 장례 기간도 5일을 원칙으로 최대 14일까지로 제한했다. 1931년 만주 침략 이후 총력 동원 체제를 갖추던 일제가 물자를 절약하고 인력을 징발하기 위해 꺼낸 조치였다. 우리 전통문화를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도 같이 담겼다. 상여로 운구할 때 호창, 즉 상여소리를 못하게 한 대목이다. 운구에 상여 대신 자동차를 사용해도 된다고 허용했는데 실은 전통 상여 행렬을 막기 위한 꼼수였다. 고종과 순종 황제 국상 때 상여를 따르던 민중들이 만세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원래 삼베는 슬픔을 표하기 위해 유족이 입는 상복의 소재였다. 거친 재질의 남루한 옷을 입고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고인에게는 삼베 수의를, 유족은 말끔하게 차린 검은 정장을 입는 것으로 뒤바뀌어버렸다는 주장이다. 근조를 표시하는 생화 화환과 영정 사진 주변을 장식하는 흰 국화꽃도 일본식에서 온 문화라고 한다. 우리 장례에서는 영좌 뒤에 병풍을 세우고 상여에는 화려한 종이꽃으로 치장해 가는 분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매장하지 않고 화장할 때 상여와 종이꽃이 함께 훨훨 날아오르도록 하려는 배려도 있었을 게다. 일제가 내린 의례준칙은 식민 통치를 위한 조치였지만 장례 날짜를 단축하고 절차를 간소화하는 데는 긍정적인 기여를 한 점도 있다.

지난주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3주기를 맞아 관련 자료를 찾다가 2015년 장례식 때 상주들이 팔에 완장을 차지 않았다는 기사에 눈길이 갔다. 일제 흔적이라는 조언을 들은 유족들이 이를 실천했다고 한다. 장례나 결혼 등 애경사 형식과 절차는 시대 상황에 맞춰 진화해야 한다. 전통도 살리면서 허례허식을 버리고 실용을 추구하는 방향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