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사설] 한국, 2만달러 국가로 주저앉을 건가(2017.1.2.)
joon mania
2018. 12. 12. 17:12
[사설] 한국, 2만달러 국가로 주저앉을 건가(2017.1.2.)
외환위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던 1997년, 매일경제신문은 경제위기의 본질을 진단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설계하기 위한 국가컨설팅 작업을 수행했다. 그래서 나온 게 매경-부즈앨런 한국보고서다. 당시 한국은 원화가치 폭락과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금융시스템이 급속히 무너져 내릴 때였다. 이런 경제위기 상황에서 보고서는 "한국은 당장 변하지 않으면 중국과 일본의 협공으로 마치 넛크래커 속에 낀 호두처럼 부서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진단했다. 공룡 경제부처인 재정경제원을 해체해 관치에서 자유경쟁으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가져오고, 지식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성장엔진을 구축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20년이 지난 지금, 정유년(丁酉年) 새해 첫날을 맞아 우리는 대한민국에 또다시 미증유의 위기가 엄습하고 있음을 절감한다. 이번의 위기는 20년 전의 위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지독하게 만성적이며, 따라서 치유하기도 힘들다. 경제위기의 범위를 넘어서 정치 사회의 위기라고들 한다. 정치·정부·기업 총체적 신뢰붕괴 위기 최순실 사태와 이로 인해 빚어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대한민국 사회를 뿌리째 흔든 대사건이었다. 국가 최고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정치 시스템 전반을 개혁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어쩌면 5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대통령이 나오고, 그에 따라 제대로 준비 안 된 대통령 선거를 치를지 모른다. 정권인수 작업 없이 대통령 당선과 함께 바로 국무위원이 임명되고 국정을 운영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게 된다.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기존 질서에 대한 거대한 도전으로 전개될 것 같은 예감이다. 부조리와 모순을 바로잡자는 데서 벗어나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세계화와 개방의 흐름을 역류시키고, 기득권층 전체를 매도하는 광풍의 소용돌이가 불어닥칠지 모른다. 광장의 촛불은 개혁과 변화를 추동하는 주체가 되고, 사회개혁을 이끄는 정의가 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무소불위의 권력이 돼가고 있다. 국제지형도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의 대외정책이 한반도에 미칠 파장의 크기가 계산하기 힘든 데다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과 같은 절대권력자의 출현 역시 동북아 정세에 험로를 예고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저성장의 늪에 가두는 건 불신 아무리 정치적 환경이나 대외적 변수가 불확실하더라도 경제가 탄탄하게 받쳐주면 우리의 걱정은 덜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제는 성장이 멈춰가고 있다. 지난 5년간 2%대의 저성장이 고착화됐고, 올해는 1%대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나온다.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가계부채는 한계 상황까지 치닫고 있다. 기업 부문을 돌아보면 어느 곳 하나 온전한 데가 없다. 그동안 한국 경제의 성장을 견인하던 철강, 조선 등 주력 업종이 대부분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할 상황에 처해 있고 수출의 버팀목이 됐던 전자, 자동차도 글로벌 시장에서 서서히 밀려나는 불길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가 증폭되고 기업 활동의 자유를 옥죄는 규제와 간섭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는 점이다. 정치권은 경제민주화를 마치 신성불가침적인 시대정신인 양 착각하고 있다. 얼마나 기업하기가 힘들고 귀찮으면 투자해야 할 돈을 은행에 저축하고 옴짝달싹하지 않겠는가. 한국에서 기업가정신은 바닥으로 추락한 지 오래다. 돌이켜 보면 한국 역사상 정치적 시련이 없었던 적이 드물었다. 그 숱한 고난을 불굴의 의지와 도전으로 헤쳐 나온 대한국민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스스로에게 "위기를 극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준비할 힘이 과연 있느냐"는 질문을 심각하게 던져본다. 어렵지만 그 해답을 찾아나서야 한다. 이 절망적 국면을 탈출하기 위해 넘어야 할 가장 중차대한 도전 과제로 우리는 신뢰 회복을 주장한다. 불신은 대한민국을 장기 저성장의 늪에 가두는 재앙이다. 정치권은 사리사욕 없이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믿음, 정부는 국민의 복리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믿음, 기업은 정당하게 돈을 벌고 세금을 내고 있다는 믿음, 국민 모두가 법을 지키고 남을 속이지 않는다는 믿음. 이런 믿음이 바닥까지 추락하면서 사회 전체가 각자도생의 길로 가고 있다. 신뢰 상실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은 신뢰 수준이 낮은 사회에 속한다. 신뢰를 측정하는 대표적 국제기구인 세계가치관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10명 중 3명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중국(5.2명)보다도 낮다. 또 한국인은 99% 이상이 가족을 신뢰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은 13%만 신뢰한다고 답했다. 이렇게 극한 차이를 보이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거의 유일하다. 거짓말 안하고 법 지키는 사람 대통령으로 '트러스트'의 저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학 교수는 한 나라의 경쟁력과 복리는 그 사회에 내재된 신뢰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고 밝혔다. 21세기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값진 자본을 고르라면 그건 신뢰다. 신뢰가 부족할수록 규제는 늘어나고 경제적 자유와 창의는 줄어든다. 신뢰 수준이 낮을수록 거래비용이 늘어나고 경제 성장은 멀어진다. 이제 대한민국은 땅바닥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신뢰를 위해 우리 국민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이 있다. 올해는 대통령 선거를 맞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대통령 후보 중 거짓말 안 하는 사람, 가장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을 일궈낼 포용적 리더십을 구축해야 한다. 혈연 지연 학연 중심으로 움직이는 정치권과 관료 집단의 사고와 행태를 혁파하는 것도 이런 포용적 리더십하에서 가능하다. 한국 경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가장 시급한 노동개혁 역시 노사정의 신뢰 없이는 법안 하나 통과가 안 된다. 대화와 타협을 백번 얘기해도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데 성과를 도출해낼 수가 없다.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신뢰는 회복돼야 한다.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4차 산업을 위한 정부 지원과 투자는 끊임없이 특혜 시비에 시달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5만달러 국가 만들어 후손에게 넘겨줘야 이제 우리는 신뢰를 손상시키는 제도나 관습이 무엇인지를 뿌리부터 찾아내 이를 바로잡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것이 10년 넘게 '2만달러의 덫'에 갇힌 한국 경제를 구출해내는 해법이다.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선진국을 향한 힘찬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 올해마저 주저앉으면 대한민국은 선진국은커녕 영원한 후진국으로 뒤처질지 모른다. 매일경제신문은 지난 20년 전 외환위기 당시 꺼져가던 대한민국호의 엔진을 다시 돌린 것처럼 올해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에 새로운 희망을 찾는 제2의 '한국보고서'를 준비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2만달러대에서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 나라이다. 4만달러, 5만달러의 국가로 가야 한다. 그런 나라를 우리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