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정담

[필동정담] 경희궁은 살아있다(2016.3.8.)

joon mania 2016. 3. 9. 09:02

[필동정담] 경희궁은 살아있다(2016.3.8.)

           




 나라를 외세에 빼앗긴 무능한 왕조의 역사라도 너무 무심했구나 싶었다. 주말에 서울역사박물관의 한 전시회를 둘러보면서 든 느낌이었다.

숙종과 영조의 어필이나 궁궐 내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도안 등 보기 힘든 유적들을 만났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해 오는 13일이면 끝나는 '경희궁은 살아있다'는 제목의 특별전이다.

광화문 인근엔 조선왕조의 다섯 번째 궁궐이었던 경희궁이 터만 남아있다. 일제는 경희궁 일대를 일본 관료 자제들이 다니는 경성중학교와 총독부 관료들 사택으로 썼다. 광복 후엔 서울고등학교가 자리 잡았다.

경희궁은 조선 중후기 220여 년간 10명의 임금이 살던 본궁이었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은 도성 재건에 나섰다. 종묘를 먼저 복구하고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했지만 옛 궁궐에 가기를 꺼렸다. 새 궁궐을 짓도록 해 1623년 경희궁을 완공한다. 경덕궁으로 불렸다가 '기쁨 넘치고(慶) 빛나는(熙)' 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첫 행사는 소현세자의 관례였다.

마지막 행사는 1844년 헌종의 가례였다. 숙종, 영조, 정조 등 중후반 융성기 임금들이 국정을 수행한 중심지였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로, 경희궁은 서궐로 어깨를 겨뤘다.

하지만 고종 때 경희궁의 비극이 시작됐다. 쓰러져 가는 나라 사정을 무시한 채 새 조선의 시대를 연다며 경복궁 중건 사업을 벌였다. 부족한 자재를 경희궁 전각을 헐어 갖다 쓰면서 폐허로 변해갔다. 경희궁과 경운궁(현 덕수궁)을 연결하는 다리 홍교도 철거됐다.

일제는 피폐해진 경희궁을 한술 더 떠 유린했다. 임금이 조회를 하던 숭정전을 일본인 사찰에 팔아버렸고, 황학정은 사직단 뒤로 옮겼다. 흥화문은 남산 자락 이토 히로부미 추모 사찰인 박문사 절문으로 썼다. 아직도 숭정전 현판은 동국대 구내 사찰인 정각원에, 반월형 석조 연못은 성곡미술관에, 샘물인 영렬천은 주변 주택가에 각각 분산돼 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 편전인 자정전 외에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개의 건물이 있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1988년부터 복원 작업에 들어가 6년여 만에 대문 격인 흥화문을 세우고 몇 개의 전각을 복원했지만 옛 모습에는 한참 못 미친다. 복원을 위해 수용된 인근 상가 철거가 진행되고 있지만 예산 부족으로 지지부진하다.

인공지능 컴퓨터와 인간의 바둑 대결에 온통 관심이 쏠린 디지털 시대이지만 과거를 만날 역사의 흔적도 아쉽고 소중하다.

[윤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