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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포럼] 누가 먼저 반성문 써야 하나 (2016.11.3.)

joon mania 2016. 11. 3. 08:52
[매경포럼] 누가 먼저 반성문 써야 하나 (2016.11.3.)

 외환위기땐 언론이 먼저 반성했다
관료들 호언을 그대로 베껴쓴 죄라고
최순실 사태엔 비서실장들에 묻는다
왜 은폐해 나라를 이꼴로 만들었는지     

    
          

 

언론이 맨 먼저 반성문을 썼다. 1997년 말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을 때 얘기다.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외쳤던 호언을 그대로 받아 적어 국민에게 전달한 죄였다. 경제관료들의 장밋빛 전망을 한 번쯤은 뒤집어보고 꼼꼼히 따져봤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한통속이었다. 정책에 대한 감시자로서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 곳간이 텅텅 비기 전에 경고의 목소리를 보냈어야 했는데 임무를 내던졌으니 석고대죄해도 부족했다.

이번에도 언론은 반성문을 쓸 뻔했다. 한때는 맹목적 지지를 넘어 숭배와 찬양에 가까운 찬사를 쏟아냈다.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 숨겨져 있던 비선의 실체를 밝혀냈으니 감시자로서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줬다.

최순실 사태의 본질은 두 갈래다. 하나는 민간인 최순실의 국정 개입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이권 챙기기다. 공직 하나 없이 장막 뒤에 숨은 최순실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미리 받아 수정하고 국무회의 자료와 청와대 비서실 인사 내용까지 받아본 것에 대해 국민은 경악했다. 미르·K스포츠재단을 내세워 기업들로부터 수백억 원을 갈취했고 그 작업에 대통령의 수석비서관과 전경련 부회장이 하수인 역할을 한 것에 입을 못 다문다.

책임을 따지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다. 공식라인을 제쳐 두고 비선을 가동하며 이들이 실세로 군림하도록 방치하고 보호한 측면까지 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대통령 업무를 시작한 뒤에도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암담하다.

그동안 박 대통령 곁에서 참모진 수장을 맡았던 역대 비서실장들에게 맨 먼저 반성문을 써내라고 요구하고 싶다. 물러난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정감사에서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변했다가 얼마나 허깨비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줬지만, 전임 이병기-김기춘-허태열은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맡았던 유승민-유정복-최경환과 당선인 비서실장을 거친 유일호까지도 대상이다.

비서실장을 맡았던 이들이 박 대통령 곁에 숨어 있던 최순실이라는 비선의 존재를 몰랐을 수 있을까. 박 대통령의 당대표 시절 대변인으로 곁을 따라다녔던 전여옥 전 의원도 진작에 이를 간파했음을 그의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비선 참모에 휘둘리는 박 대통령의 행태를 감지했다면 이렇게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심각해지기 전에 제동을 걸었어야 한다. 박 대통령과 18년을 같이해 온 문고리 3인방 비서관이야 최순실과 한 배를 탔을 테니 논외로 치더라도 비서실장들까지 최순실의 하수인인 양 전락한 일부 수석비서관들처럼 처신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 비서실장들이 비선의 존재를 알고도 은폐하고 눈감아 왔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당대표 박근혜와 대통령 박근혜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비서실장들의 실책은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지금 국가 체계의 무력화로 나타나고 있으니 그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잘 보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먼저 국민에게 반성문을 제출하고 용서를 빌지 않으면 박 대통령이 나서 진상을 고백해야 하고 권한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으로 갈 판이다. 어제 꺼낸 일방통행식 김병준 새 총리 지명도 야권 반발을 키우고 국민 여론을 더 악화시켰다.

미르재단 초대 이사장이었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김형수 원장이 검찰 출두 전 내놓은 성명에서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주장하자 대학원생들이 이렇게 되물었다. 정말 부끄럽지 않습니까?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 입학과 학사관리 특혜 의혹 때 총장과 연루 교수를 향해 학생들은 똑같이 물었다. 부끄럽지 않으냐고.

최순실 사태의 책임을 묻자면 나열하기도 버겁다. 그래도 다 제치고 오늘의 박 대통령을 만들기까지 보좌진을 총괄해온 비서실장들에게 묻는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윤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