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정담

[필동정담] 한국학 개척자 호머 헐버트(2018.1.31.)

joon mania 2018. 1. 31. 08:51

[필동정담] 한국학 개척자 호머 헐버트(201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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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본 난에 19세기 말 일본 학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한·중·일의 인문사회과학에 남긴 공헌을 다뤘더니 몇몇 독자들이 의견을 보내왔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건 비슷한 시절 조선 땅에서 활동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국인들에게는 구한말 학문, 문화, 언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독립운동사에도 빠질 수 없는 비중을 가진 분인데 제대로 몰랐다는 부끄러움도 함께 받아들였다.

헐버트 박사는 감리교회 선교사로 1886년 내한해 관립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며 고종의 대외 자문을 맡았다.
1905년 을사늑약 후엔 밀서를 갖고 미국에 가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전하려다 실패했다. 1907년 고종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했고 스스로 먼저 건너가 우리 대표단의 호소문을 회의시보에 싣는 등 몸을 던졌다가 일제에 의해 본국으로 추방됐다. 그에게 한국학의 개척자라는 호칭을 붙이고 근대교육의 새 장을 열었다고 추앙하는 건 다방면의 활동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1891년 출간한 교과서 사민필지는 이 땅에 한글 범용의 단초를 열었다. 한글 띄어쓰기는 헐버트의 주창으로 확산됐다. 각 지역마다 있던 구전민요 아리랑에 음계를 처음 붙여 보급한 것도 그다. 1905년 출간한 2권짜리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는 단군부터 고종까지를 아우른 최초의 종합 역사책이다. 그는 한국과 한민족에 관련한 15권의 단행본, 3권의 자서전, 200여 편의 논문과 신문 기고문을 썼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뤼순 감옥에서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일본 경찰에 공술하며 존경을 표했다.

그는 1949년 8월 42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으나 일주일 만에 사망했다.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을 거쳐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한국으로 출발하며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뜻대로 됐다. 우리 정부는 1950년 건국공로훈장에 이어 2014년 금관문화훈장 등 두 차례 수훈해 그를 기렸다.

한국을 사랑한 그를 잊지 않기 위해 금융인 출신의 김동진 회장이 이끄는 사단법인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유지를 보존하는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어 다행이다. 사업회는 지난해 11월 제39회 외솔상을 받아 존재를 인정받았는데 뜻있는 이들이 동참하면 더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