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끌려 우연히 따라갔는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궁중채화 전시회`에서다.
화사한 꽃은 영락없이 살아 있다. 벌과 나비는 막 날아오를 것 같다. 그렇게 생생한 자태의 모란과 매화를 본 기억이 없다. 조선시대 왕실 공예 수준이 이 정도였나. 궁중의 품위가 느껴진다. 조상들의 미학을 읽었다.
궁중채화(宮中綵花)란 임금이 자리하는 연회나 잔치 때 장식을 위해 제작된 꽃이다. 가화(假花)다. 임금이 보셔야 할 꽃이니 절대로 시들어서는 안 된다. 생화를 꺾어 장식하지 않는 게 궁중 법도였다. 가짜 꽃을 진짜처럼 내놓아야 한다.
종이로는 오래가기 힘들고 자칫 천박해 보인다. 비단과 모시가 대신 쓰였다. 송홧가루나 밀랍, 촛농이 더해진다. 아교나 풀 외에 꿀이 접착제다. 녹을 막으려 철사 대신 가는 대나무를 썼다. 본래 꽃에서 우려낸 즙으로 색깔과 향기도 더한다. 여름철엔 빙화(氷花)도 등장했다.
이렇게 희귀한 자산이고 공예 기술인데 2013년 초에야 중요무형문화재(제124호)로 지정됐다. 일제 강점기 때 사실상 단절된 걸 기능 보유자 황수로 선생(79)이 복원해냈다. 황 선생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갔다가 조선왕실을 깎아내리는 일인들에게 우리 전통을 보여주려고 평생을 바쳤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1829년 순조 즉위 30년과 40세 생신을 기념해 열린 잔치 때 쓰인 궁중채화를 생동감 있게 재현해냈다. 2004년 덕수궁 중화전 야외 전시 때는 실제 벌과 나비가 날아들기도 했다.
유럽에도 비슷한 꽃장식 공예가 있다. 19세기부터 4대에 걸쳐 이어져온 프랑스 르제롱(Legeron) 가문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도 한쪽에 같이 전시돼 있다. 디오르, 웅가로 등 세계적인 브랜드에 드레스와 모자 장식으로 활용된다.
아무리 명품에 쓰인다 한들 느낌이 다르다. 기계로 대량 생산하는 유럽 꽃장식과 한 땀 한 땀 떠낸 손길을 냄새 맡게 하는 우리 궁중채화의 차이일 것이다.
꽃장식 향연은 이달 25일까지 이어진다. 세월호 참사에 지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거다. 무료라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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