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태영 부속실장의 청와대 일기 | ||
| 입력: 2005년 10월 05일 18:15:37 | ||
#두 달 전쯤의 일 관저의 서재에서 보고를 받고 있던 대통령을 여사님이 거실에서 급히 찾았다.
“여보, 빨리 나오세요. 정연이 전화 연결되었답니다.” 미국에 나가 있는 딸과 통화를 할 일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리를 나오려는 순간, 수화기를 든 여사님 옆으로 다가선 대통령의 느닷없는 한마디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자, 시작할까요?”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안부전화가 아니라는 예감이 퍼뜩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를 앞에 들고 나란히 선 내외는 대통령의 ‘하나, 둘, 셋’ 구령과 함께 합창을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딸의 생일날, 대통령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은, 평범한 아버지의 따뜻한 부정이 대통령의 거실에 은은히 감돌았다. #대통령은 콧노래를 자주 부른다 특별히 정해진 레퍼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고를 받기 위해 관저의 긴 복도를 걸어 나올 때 자주 목격된다. 뛰는 경우도 있다. 지난 봄 기자단과의 산행 때 일이다. 준비가 늦어져 약속된 시간을 지키지 못할 듯하자, 대통령은 서둘러 등산 모자를 챙기기 위해 안방을 향해 성큼성큼 뛰었다. 대통령의 그 바쁜 걸음을 멈추게 하는 걸림돌도 있다. 길을 막아서는 손녀의 재롱이다. 아무리 급해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때로는 복도를 막고 작은 의자에 걸터앉아 유모차처럼 밀어달라는 다소 막무가내의 부탁도, 단 1m를 밀어주는 시늉으로 달랠지언정 결코 거절하지 않는 인정 많은 할아버지. 예외도 물론 있다. 언젠가 퇴청하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손녀가 문 앞까지 나와 있자, 아는 체 하면 다음 일정이 늦어질까 봐 가만히 차 문을 열고 내린 뒤 조용히 현관으로 숨어버린 비정한(?) 할아버지의 모습도 있었다. #때로는 낙담하는 대통령 한번은 직접 작성하여 참모들에게 검토를 요청했던 서신의 내용 가운데, ‘삭제 요망’으로 의견이 모아진 단락이 있었다. 그 내용을 듣는 순간, 대통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집필 과정에서 삭제했던 부분이 저장 잘못으로 그대로 살아있었던 것. 그런가 하면 8·15 경축사를 준비할 때에는 하루 종일 공들여 입력한 문안을 실수로 날려버리기도 했다. 일하는 방법의 혁신을 강조하는 대통령에게도 실수는 있는 법. 대통령은 그럴수록 업무혁신에 더욱 심혈을 기울인다. ------------------- #대통령의 철학이 빚어낸 변화들 이제는 청와대 안의 그 누구에게나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변화들이다. 그 하나하나에 ‘대통령’이라는 잣대를 알게 모르게 들이대며 낯설어 하던 기억이 새로울 정도다. 그러나 그렇게 변화를 만들어온 대통령에게도 여전히 미완의 과제들은 남아 있다. 쉽게 넘을 수 없었던 관행과 제도의 벽들이 군데군데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걸어갈까?” 집무를 마친 대통령은 가끔 관저를 향해 걷는다. 녹지원을 지날 때면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을 대통령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표현하곤 한다. 주말을 이용해 뒷산인 북악산에 올라도 대통령의 미안함은 계속된다. “하루빨리 이곳을 서울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할 텐데.” 까다로운 의전도 빼놓을 수 없는, 미완의 숙제 가운데 하나. 끊임없는 변화의 시도가 이루어지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 명제이다. 최근 언론사 간부 초청 오찬 당시 대통령이 입장해도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한 것은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또 하나의 작은 모색이다. #대통령의 말 이만큼 논란이 많은 주제도 없다. 대통령의 언어에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생소한 표현들이 종종 등장한다. 어린 시절부터 체화된 특유의 표현인 듯싶어 대통령 고향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정작 돌아오는 대답은 ‘나도 처음’이 비일비재하다. 최근 대통령은 자신이 알고 있는, ‘불가능한 일’을 말할 때의 세 가지 표현을 소개했다. ‘소금이 시어질까? 바닷물이 넘칠까? 해삼이 나무에 올라갈까?’였다. 언젠가 ‘너무 쉬운 일’을 뜻하는 표현으로 소개했던 ‘절구통에 새알 까기’의 반대말인 셈. 그때나 지금이나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언어의 유쾌한 매력’이다. 물론 아픔도 있다. 최근 어느 비공식 만찬에서 ‘죽을 둥 살 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대통령은 이내 ‘이건 대통령이 쓸 표현이 아니죠’ 하며 곧바로 취소했다. 2년 반이 넘는 시달림으로부터 체득한 나름의 경계였을까? #그리고 ‘친구 같은 대통령’ 2002년 4월, 대통령의 민주당 후보수락연설로 돌아가 보자. “경호원 한두명과 남대문시장에, 자갈치시장에, 동성로에, 금남로에, 은행동 거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통령, 거기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 그런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얼마 전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이 약속도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아쉬움이 있는 사안이다. 대통령의 꿈과 의지로도 아직 뛰어넘지 못한 벽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보냈던 지난 설 휴가의 단축이 그 대표적 사례. 북한의 핵 보유 선언도 휴가를 어지럽힌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지만, 한밤중 우연히 나선 베란다에서 목격한 경호원들의 밤샘 모습도 휴가 단축의 큰 요인이었다. -------------------- #눈을 청와대 밖으로 돌리면 큰 세상은 큰 세상대로 더 큰 벽들이 곳곳에 건재하고 있다. 신문의 칼럼에서 또 인터넷의 댓글에서 대통령의 의제와 언행은 낱낱이 해부되고 또 충분히 난타 당하고 있다. 국정운영에 대한 지지도 역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던 시대의 흐름도, 또 그가 대통령이 되면 실현하고자 했던 시대정신도 아직은 이 큰 벽을 뛰어넘을 만한 대세를 형성하고 있지 못하다. 취임 초기, 대통령이 처한 상황은 ‘사면구가(四面舊歌)’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오히려 새 시대를 열겠다는 역설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역설이 생겨났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지금, 대통령은 ‘새 시대의 맏형’보다는 ‘구시대의 막내’가 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대통령이 지고 가야 할 짐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대선자금 문제로 도덕적 신뢰에 손상이 간 상태에서, 이라크 파병은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통령의 변화를 요구했다. 강한 권력의 제왕과도 같은 대통령이 그 한 축의 요구였다면, 다른 한 축의 요구는 끝없이 인내하며 묵묵히 순응하는 신하와도 같은 대통령이었다. 그 중간은 없었다. 대통령상에 대한 엇갈린 요구만큼이나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것이 사회적 공론이다. 이 또한 지도자로서의 대통령이 넘어야 할 벽이다. ‘총론 동의, 각론 반대’ ‘명분 찬성, 양보 거부’로 상징되는 갈등구조의 악순환 앞에서는 대통령 권력도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권력기관을 장악하라’ ‘당을 장악하라’는 요구가 줄을 이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이 아니었다. 이미 지금은 사회적 합의의 과정과 내용이 대통령 권력보다 중요한 시대이다. #물론 자랑할 만한 변화도 있었다 일관된 평화번영정책은 6자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 해결의 물꼬를 텄고, 참여정부 아래서 사회의 투명성은 한 단계 높이 도약했다. 작은 병이 큰 병으로 도지는 것을 막으면서 경제와 사회 전반의 건강성을 회복시켜온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로서의 대통령이 수행해야 할 보다 근본적인 과제들은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바로 10년, 20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하면서 우리 사회의 기초를 새롭게 하는 일이다. 기득권의 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합리적 시민사회의 튼튼한 주춧돌을 놓기 위해 오늘도 대통령은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한다. ---------------- #대통령과 참모들의 대화 10월1일 국군의 날. 계룡대 행 KTX에 오른 대통령은 비서실장, 안보보좌관, 경호실장, NSC 사무차장과 환담을 나누었다. 이 또한 이미 익숙해진, 변화하는 청와대의 한 단면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대통령과 참모들 간에는 대화의 장이 열린다. 환담 도중 박기영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화제에 오르자, 대통령이 농담 한마디를 던진다. “출산장려정책을 확실하게 하려면, 아이 안 난 사람에게는 인사 상 불이익을 줘야 하지 않습니까?” 좌중이 웃음바다가 된다. 그러자 경호실장이 정색하고 이야기를 한다. “경호실에도 결혼 안 한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그동안엔 결혼하면 퇴직을 시켰는데, 결혼하고 애를 낳아도 보육기간 동안 휴직을 보장하겠다고 했더니 결혼을 많이 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이어지는 대통령의 지시. “그것 한번 정식으로 보고해 주십시오. 경호실에서 발제를 해주세요.” 갑자기 일거리가 생긴 경호실장에게 던지는 대통령의 코멘트. “말 꺼내기 겁나죠?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갑니다.” 돌아오는 서울 행 KTX 안에서의 환담에는 철도공사 부사장도 자리를 함께 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남북철도의 연결을 넘어 TSR, TCR로의 연결, 이를 통한 동시베리아 자원 개발 참여 및 중국 동북 3성의 발전 과정에서 한국경제에 주어질 기회와 역할로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 정치에 대한 대통령의 담론으로 귀결되었다. #“경상도 말에 ‘끓도(끓지도) 않고 넘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설익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정치에도 일종의 정치적 무기력 상태가 있습니다. 정치적 협상력은 높아지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의 발목만 잡아,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경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대화주의와 대결주의의 차이입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좌우의 상호 견제 시대가 아니라, 타협주의와 극단주의가 서로 견제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마주 보며 평행선을 달리는 선로 위에서의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KTX는 어느 새 유라시아를 거쳐 파리로 달리는 꿈을 안은 채, 종착지인 서울역에 도달해 있었다. |
<경향신문 10월 6일자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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