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절벽(fiscal cliff)은 경제학 교과서엔 없지만 익숙해진 시사용어다. 갑작스러운 재정 지출 축소나 중단으로 인한 파장을 말한다.
이로 인해 기업과 가계의 세금 부담이 늘어나 투자와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고 경기 침체를 가져오는 현상이다. 골드만삭스의 이코노미스트 알렉 필립스가 2011년 10월에 쓴 보고서에서 처음 등장했다. 석 달 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곧 닥쳐올 위기를 경고하면서 이 표현을 인용한 뒤 널리 확산됐다.
요즘 재정절벽을 흉내 낸 표현이 분야마다 쓰이고 있다. 심각한 청년 실업은 고용절벽으로 요약된다. 출산율 1.2명과 생산가능인구 감소는 인구절벽으로 불린다. 수출절벽, 성장절벽까지 나왔다.
지난달 초 유일호 경제팀이 내놓은 경기보강대책은 재정에서의 돈 풀기 확대와 세금 깎아주기를 통한 소비촉진 방안이었다. 소비절벽으로 치닫는 경제 상황을 돌려보기 위한 안간힘 쓰기다. 유일호 부총리는 "가용 재원과 수단을 총동원해 위축된 내수를 살리려 한다"고 까놓고 말했다.
지난해 말까지만 시행하고 종료했던 승용차 개별소비세 인하를 6월 말까지 재연장했다.
그랜저나 K7 차량을 살 경우 55만원에서 70만원까지 세금을 덜 낸다. 새 차 살 때 세금 부담 덜어주고 테마파크나 영화관 등의 할인 이벤트로 소비를 살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정도로 성과를 얼마나 거두겠느냐는 김 빠지는 예측이 적지 않다.
우리도 유럽이나 일본처럼 마이너스금리를 도입한들 돈을 장롱 속에 쌓아두지 않고 소비에 나설지 자신 없다.
소비는 쓸 여력 있는 계층에서 이뤄져야 한다. 가계든 기업이든 당장 갚아야 할 부채를 떠안고 있으면 빚 갚는 데 우선한다. 곧 투자를 해야 하거나 중요한 일에 지출을 앞두고 있다면 당장의 소비를 꺼리는 건 인지상정이다. 빚도 없고 지출할 큰일이 없다면 돈을 써야 할 텐데 요즘 세태를 보면 거리가 멀다. 많은 자산을 가졌어도, 남 부러울 연금을 받아도 노후에 대비해야 한다며 움켜쥐고 있기만 한다.
KB금융경영연구소 조사엔 은퇴 후 30년을 살기 위한 평균 노후 필요자금이 월 226만원 정도다. 이 정도 지출하려면 연금 수입 외에도 이자나 배당을 받을 10억원 정도의 금융자산과 사는 집을 포함한 부동산을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고 연연한다.
이런 이들에게 미국의 재무설계사 스티븐 폴란이 던진 21세기의 경제철학 한마디를 소개하고 싶다. `다 쓰고 죽어라(die broke)`는 지침이다.
폴란은 부동산업자로 시작해 벤처캐피털 대표로 돈도 벌고 명성도 얻은 시점에 어느 날 병원에서 폐암 판정을 받았다. 수술과 항암 치료에 들어갈지 고민하다 추가 검진에서 오진이었음을 확인한 그는 삶의 행로를 바꾸고 돈 모으기와 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뒤집었다. 폴란의 조언은 모은 돈을 후회 없이 쓰고 떠나라는 주문이다.
이자나 배당에만 연연하지 말고 원금을 쓰겠다고 생각을 바꾸면 훨씬 많은 가처분 자산이 생긴다. 사는 집을 담보로 한 역모기지까지 활용하면 더욱 늘어난다.
살아생전 쓰지도 못할 돈을 쌓아두기만 하면 죽은 뒤에 무슨 소용이 있나. 미래에 쓰려 모아두는 것보다 지금 쓰는 게 핵심이다. 머릿속에서 그리는 내일을 위한 건강관리보다는 오늘 당장 운동하는 게 더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 말고 은퇴 후 여생을 최대한 즐기고 떠나야 한다. 재산을 물려받고 나면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경우 상속을 무효화하는 불효자법 제정이나 끝까지 잘 모신다고 약속하는 효도계약 얘기까지 나오는 판이다. 물려줄 재산이 없으면 자식들 간에 다툼의 소지도 오히려 없다.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쓰지 않고 움켜쥐고 있는 한 소비는 살아나기 어렵다. 노후에 대한 과도한 걱정,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떨쳐야 한다. 소비를 살려 경제가 돌아가는 선순환 구조를 끌어내려면 다 쓰고 죽으라는 미친 소리 같은 철학을 과감하게 실천해 보시라.
[윤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