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그리고 인생

시 모음

joon mania 2023. 12. 20. 09:36


처음 처럼/신영복(1941-2016)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 처럼,새봄 처럼,처음 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호수/ 정지용(1902-1950)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가릴수 잇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 밖에

———-

멀리서 빈다/ 나태주(1945년생)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새해 아침 / 나 태 주

언제나 좋은 벗
당신의 향기가 
나를 살립니다.

———

새해 인사 / 나태주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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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이기철(1943~ )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그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 막힘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잔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 소릴 낸 적 있었던가
고통이 언제 뼈를 드러낸 적 있었던가
목조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를 패망시키지는 못한다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매질은 따가울수록 생을 단련시키는 채찍이 된다

이것은 결코 수식이 아니니
고통이 끼니라고 말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누군들 근심의 힘으로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을 딛고 생을 건너간다
아무도 보료 위에 누워 위기를 말하지 말라
위기의 삶만이 꽃피는 삶이므로

시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민음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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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최하림(1939~2010)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들을 본다

아무 생각없이, 고통스럽게
지나가버린 시간들
다시 잡으려 해도 소용없는
시간 속으로 나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잃어버린 시간들을 다시 찾을 수도 없다

변해버린 사람과 깨어진 사랑
속에서 나는 걸음을 옮겨야 한다

남루한 저고리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물푸레나무 우거진 길로, 물 속으로,
이슬비 내리는 둑에서 나는 보아야 한다

세상이란 좋은 것이다
서로 잘 어깨동무하고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며 산다

비 내리는 둑에서
나뭇잎들은 푸르고
산 색은 살아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슬픔 기쁨
으로 밤을 걸어가고 가끔 불켜진
창을 올려다보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날이 깊어간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기억이 희미해지고 모든
사랑이 딱딱한 사물로 변해간다

내 손에서 따스했던 네 손이 사라진다
이제 나는 잃어버리게 될 시간들
을 생각하고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물푸레 나무가
우거져 있다 시간들이 우거져 있다

-詩集,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文學과知性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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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月이 가면/ 朴寅煥(1926~1956)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詩集, 木馬 와 淑女 槿域書齋, 1976


——

밥상/이기철(1943~ )

산 자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상 위에 수저 놓이는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 또 있는가 

아침마다 사람들은 문밖에서 깨어나
풀잎들에게 맡겨둔 햇볕을 되찾아오지만
이미 초록이 마셔버린 오전의 햇살을 빼앗을 수 없어
아낙들은 끼니마다 도마 위에 풀뿌리를 자른다

청과시장에 쏟아진 여름이 다발로 묶여와
풋나물 무치는 주부들의 손에서 베어지는 여름
채근採根의 저 아름다운 殺生으로 사람들은 오늘도
저녁으로 걸어가고
푸른 시금치 몇 잎으로 싱싱해진 밤을
아이들 이름 불러 처마 아래 눕힌다

아무것도 탓하지 않고 全身을 내려놓는 빗방울처럼
주홍빛 가슴을 지닌 사람에게는 未完이 슬픔이 될 순 없다

산 者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솥에 물 끓는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 또 있는가

ㅡ시전집, '우리 집으로 건너온 장미꽃처럼 시가 이렇게 왔습니다', 문학사상,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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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말 걸기/나호열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예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


사랑이란 / 양현근

키 큰 나무와 키 작은 나무가 어깨동무하듯
그렇게 눈 비비며 사는 것

조금씩 조금씩 키돋음하며
가끔은 물푸레나무처럼 꿋꿋하게 
하늘 바라보는 것

찬서리에 되려 빛깔 고운
뒷뜨락의 각시감처럼
흔들리지 않게 노래하는 것

계절의 바뀜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는 것

새벽길, 풀이슬, 산울림 같은
가슴에 남는 단어들을
녹슬지 않도록 오래 다짐하는 것

함께 부대끼는 것
결국은 길들여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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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냄새/안도현(1961~ )

싸락눈 흩뿌리는 날
퇴근길
언 코끝으로, 살속으로                      
파고드는 가족이여
최저생계비여

- 시집, '모닥불', 창비, 1989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것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 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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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감별하기/ 이희중(1960~ ) 


잘나가는 폴 매카트니나 존 레논보다는
그들이 불쌍해 마지않던
음울한 조지 해리슨, 또는 못난 링고 스타를 더 좋아한 사람
해바라기의 보스 이주호보다는
누군가의 마음에 따라 자주 교체되던
그 짝꿍한테 더 눈길이 가던 사람

비틀스나 해바라기보다, 우연히 들른 술집 손님들의 잡담 너머에서, 그냥 켜둔 텔레비전처럼 노래한 다음
갈채 없이 슬며시 퇴장하는
삼류 가수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는 사람
그를 위해 혼자 천천히 박수 치는 사람

김일보다 장영철을 더 좋아한 사람
프로레슬링은 쇼다, 라는 그의 말을 믿은 사람
한마디 말이 세상을 뒤집어 보게 하는
놀라운 마력을 겪은 후 다시 그런 일을 기다리는 사람

홍수환보다는 염동균을 더 좋아한 사람
말년에 그가 오른손을 접고 싸웠다는 사실을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는 사람
그들보다, 세미파이널을 피 튀기며 뛰는 삼류 복서들이, 또 그 세미파이널이 케이오로 일찍 끝났을 때에 대비하여
뛸 수 없을지도 모를 싸움을 준비하는 복서들이
있다는 사실을 더 진지하게 기억하는 사람

안정환보다는 윤정환을 더 좋아한 사람
우리 편이 골 넣었을 때
벤치에 앉은 후보 선수들의 표정을 살피는 사람
국가대표가 되지 못한 프로 선수,
그 일군도 되지 못한 이군 선수들이 더 신경 쓰이는 사람

현대 차 안타고 굳이 대우나 쌍용 차 타던 사람
아주 옛날에는, 일등 하던 오비보다는 크라운을 더 좋아했고
세월 흘러 크라운이 하이트로 바꾸어 일등하자 도로 오비나 카스 마시는 사람

대접받는 애완동물 보면 속이 거북한 사람
꼬리 치는 것 보기 싫어 개를 안 키우는 사람
조세형이나 신창원이 잡히지 않기를 바란 사람
이종대, 문도석, 그리고 지강헌과 그의 마지막 신청곡 비지스의 홀리데이
이런 이름들을 술자리에서 꺼내기를 즐기거나 누가 꺼내면 반기는 사람

엄숙한 자리에 앉으면 사지가 뒤틀리는 사람
정장한 제 사진은 보관하지 않는 사람
여간해서 넥타이를 안 매는 사람
평창동, 압구정동, 개포동, 대치동이 남의 나라 같은 사람

학창 시절, 선생이 이름 기억해 부르면 불편하던 사람
반장 패거리보다 사고뭉치들과 어울리던 사람
자신이 바로 사고뭉치였던 사람
창간할 무렵에는 안 보이다가 요즘 와서 한겨레 보는 사람
돈 먹여 아들 군대 안 보낸 사람은
대통령 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군대 갔다 온 사람
통일을 사심 없이 바라는 사람
이 세상이 뒤집혔으면 하고 가끔 바라는 사람
실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더 자주
더 편안하게 전원주택을 꿈꾸는 사람
아웃사이더이다, 아니다에 관심 없는 척하지만
이런 시 읽으면서 동그라미 치며 자신을 감별하고 있는 사람

-시집,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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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편지 ㅡ 하동행 / 곽재구(1954~ )

늦은 밤
구례구역 앞을 흐르는
섬진강변을 걸었습니다

착한 산마을들이
소 울음빛 꿈을 꾸는 동안
지리산 능선을 걸어 내려온 별들이
하동으로 가는 물길 위에
제 몸을 눕혔습니다

오랫동안
세상은 사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억압과 고통 또한 어두운 밤길과 같아서
날이 새면 봉숭아꽃 피는 마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 아직 스무 살 첫 입맞춤의 추억
잊지 않았습니다

폭염 아래 맨발로 걷고 또 걸어
눈부신 바다에 이르렀을 때
무릎 꺾고 뜨겁게 껴안은
당신의 숨소리 잊지 않았습니다.

- 시집,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열림원, 1999

————

해 / 朴斗鎭(1916~1998)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ㆍㆍㆍ,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ㆍㆍㆍ,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음악/金洙暎(1921~1968)

음악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자
저무는 해와 같이
나의 앞에는 회색이 뭉치고
응결되고
또 주먹을 쥐어도 모자라는
이날 또 어느 날에
나는 춤을 추고 있었나 보다

불이 생기어도
어젯날의 환희에는 이기지 못할 것
누구에게 할 말이 꼭 있어야 하여도
움직이는 마음에
형벌은 없어져라

음악은 아주 험하게
흐르는구나
가슴과 가슴이 부딪치어도
소리는 나지 않을 것이다
단단한 가슴에 음악이 흐른다

단단한 가슴에서 가슴으로
다리도 없이
집도 없이
가느다란 곳에는 가시가 있고
살찐 곳에는 물이 고이는 것이다

나의 음악이여
지금 다시 저기로 흘러라
몸은 언제나 하나이었다
물은 나의 얼굴을 비추어 주었다

누구의 음악이 처참스러운지 모르지만
나의 설움만이 입체를 가지고
떨어져 나간다
음악이여

————

풀/김수영(1921~1968)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5.29>

- 김수영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집,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교보문고,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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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브래지어/박영희(1962~ )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 창비,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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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얼굴 /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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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막혀/한용운(1879~1944)

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건만
산 넘고 물 넘어 나의 마음을 비칩니다.

나의 손길은 왜 그리 짧아서
눈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 만지나요.

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만은
산에는 사다리가 없고
물에는 배가 없어요.

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
나는 보석으로 사다리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
오시려도 길이 막혀서 못 오시는 당신이 기루어요.

- 시집, '님의 침묵'

———

마음씨 / 이중길

마음에 씨가 있네
좋은 씨 나쁜 씨
어떤 씨를 심을까
좋은 씨를 뿌려야지
뿌린 대로 거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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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살스/ 진은영(1970~ )
 
음악은ㅡ밤의 망가진 다리 
하느님이 다리를 절며 
걸어 나오신다 

음악은ㅡ영혼의 가느다란
빛나는 갈비뼈 
물질의 얇은 살갗을 뚫고 나온 

음악은ㅡ호박琥珀에 갇힌 푸른 깃털 
한 사람이 나무로 만든 심장 속에서 
시간의 보석을 부수고 있다 

음악은ㅡ무의미 
우주 끝까지 닿아 있는 부드러운 달의 날개 아래서 
길들은 펼쳐졌다 잠이 들었지 

-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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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이 지나가네/박정대(1965~ )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내 청춘이 가고 있네

- 시집, '삶이라는 직업', 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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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나란히 밤길을 걸을 땐/이창기(1959~ )

아들과 함께 나란히 밤길을 걷다가 
기도원 앞 다리께서 서로 눈이 맞아 달처럼 씨익 웃는다. 

너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안쓰럽다거나 어느새 거칠어진 내 숨소리가 마음 쓰여서만은 아닐 게다. 

아마 나란히 걷는 이 밤길이 언젠가 아스라이 멀어져갈 별빛과 이어져 있음을, 그리고 그 새벽에 차마 나누지 못할 서툰 작별의 말을 미리 웃음으로 삭히고 있다는 뜻일 게다. 

아들과 나란히 밤길을 걸을 땐, 벙어리인 양, 서로 마주 보며, 많이 웃자.

- 시집, '착한 애인은 없다네',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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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中問答>         李白

問余何意棲碧山 (문여하의서벽산)
내게 묻기를, 어찌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웃고 답하지 않아도 마음은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居 (도화유수요연거)
복숭아꽃 물을 따라 멀리 흘러가노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인간 세상과는 또 다른 별천지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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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余何事栖碧山(문여하사서벽산)
뭣하러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물으시나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허허 그걸 꼭 말해야하나 저길 보시게
桃花流水窅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떨어져 시냇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는 저곳을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여기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대들이 놀던 그런 세상이 아니라네

(이백이 호북성 안륙의 벽산에 살 때 지은 것으로 20대 후반의 작품입니다. 왜 한시를 읽느냐고 물으면 늘 이 시를 떠올립니다. 한시는 청산에 사는 이백의 마음처럼 笑而不答心自閑의 경계랍니다. )

——

무소의 뿔/공지영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수선화에게/정호승(1950~  )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시집,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열림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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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서설/문병란(1935~2015)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풀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 시집, '인연서설', 시와사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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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마음/정채봉(1946~2001)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

만남/정채봉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이기철(1943년생)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돌멩이는 더 작아지고 싶어서 몸을 구르고
새들은 나뭇잎의 건반을 두드리며
귀소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어둠이 나무 그림자를 끌고 산 뒤로 사라질 때
저녁밥 짓는 사람의 맨발이 아름답다
개울물이 필통 여는 소리를 내면
갑자기 부엌들이 소란해진다
나는 저녁만큼 어두워져서는 안 된다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

———-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김태동(1965~)

슬픔이 다하는 날 나는 길모퉁이에서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을 떠나보내며
아름답게 죽어가리라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담벼락 굵은 글씨로 써내려가리라 
빗물이 하염없이 내 마지막 숨결의 영상을 흘러갈지라도
나 그 빗물 되어 사랑했었다고 소리치리라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사람도
오랜 침묵 뒤 저 금빛 저무는 산 한 그루 나무가 되리니
누구보다 먼저 아름다운 시절 사랑했었다고 
목이 메는 갈매기도 세월은 늘 물결 부서지는 암초더미에 걸려 
가족을 잃고 사랑을 잃고 푸르게 푸르게 울고 있듯이
슬픔이 다하는 날 나 돌아보지 않으며

나,
이 아름다운 시절 사랑하며 이곳을 떠난다고 
길모퉁이 지워지는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이여 연인이여 
빗물이 하염없이 내 마지막 숨결의 영상을 흘러간다
이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이런 아름다운 시절이

- 시집, '청춘', 문학과지성사, 1999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김광규(1941년 생)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1979년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

안개의 나라 / 김광규(1941년생)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신동엽(1930~1969)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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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落花/조지훈(1920~1968)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우름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청록집', 박목월ㆍ조지훈ㆍ박두진 교보문고, 2016

——

낙화/이형기(1933~2005)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세월/곽재구(1954~)
 
하얀 민들레 곁에 냉이꽃
냉이꽃 곁에 제비꽃
제비꽃 곁에 산새콩
산새콩 곁에 꽃다지
꽃다지 곁에 바람꽃

소년 하나 
언덕에 엎드려 
시를 쓰네
 
천지사방 꽃향기 가득해라
걷다가 시 쓰고
걷다가 밤이 오고
밤은 무지개를 보지 못해
아침과 비를 보내는 것인데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이슬밭에 엎드려 
한 노인이 
시를 쓰네

-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 창비, 2021

——

사랑/김수영(1921~1968)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1961>

- 金洙暎 詩選集-'사랑의 변주곡'- 白樂晴 엮음, 창비, 1990

——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1941~2022)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루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김지하詩選集,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안도현(1961~)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올 때가 있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이라든가
내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이라든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갈아엎는 치통이라든가
귀틀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라든가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같은 거

내 몸에 들어와서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마구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댈 때가 있네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네
고대광실 구름 같은 집이 아니라
구름 위에 실컷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오면 천하를 때릴 천둥 번개 소리가 아니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러워져
소주 한 잔 마시러 가네

소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이 저의 감옥인 줄도 모르고
내 몸에 들어와서
나를 뜨겁게 껴안을 때가 있네

- 시집, '바닷가 우체국', 문학동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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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馬와 淑女/朴寅煥(1926~1956)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生涯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少女는 
庭園의 草木 옆에서 자라고 
文學이 죽고 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雜誌의 表紙처럼 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詩集, '木馬 와 淑女', 槿域書齊,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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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미美의 창조/한용운(1879~1944)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

바람에 실어/박남준(1957년생)

어찌 지내시는가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하늘의 해, 지는 노을 저편으로 수줍게 얼굴 내어미는 아미 고운 달, 그곳에도 무사한지. 

올 장마가 길어 지루할 거라느니 유별나게 무더울 거라느니,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었지 초복인가 했더니 어느덧 말복이 찾아들고 입추라니, 가을의 문턱에 들었다니 아,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이곳 모악의 밤도 이제 서늘한 입김 피워올리니 따듯한 불기가 간절하구려.

보고 싶구려 
내 날마다의 밤 그리움으로 지핀 등 따듯한 온돌의 기운 바람에 실어 보내노니 어디 한번 받아보시려나 서리서리 펼쳐보며 이 몸 생각, 한 점 해 주실런가.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고정희(1948~1991)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시집,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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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낀/허수경(1964~2018)
 
구름을 베낀 달
달을 베낀 과일
과일을 베낀 아릿한 태양
태양을 베껴 뜨겁게 저물어가던 저녁의 여린 날개
그 날개를 베끼며 날아가던 새들

어제의 옥수수는 오늘의 옥수수를 베꼈다
초록은 그늘을 베껴 어두운 붉음 속으로 들어갔다
내일의 호박은 작년, 호박잎을 따던 사람의 손을 베꼈다

별은 사랑을 베끼고
별에 대한 이미지는 나의 어린 시절을 베꼈다
어제는 헤어지는 역에서 한없이 흔들던 그의 손이
영원한 이별을 베꼈고
오늘 아침 국 속에서 붉은 혁명의 역사는
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다

눈동자를 베낀 깊은 물
물에 든 고요를 베낀 밤하늘
밤하늘을 베낀
박쥐는 가을의 잠에 들어와 꿈을 베꼈고
꿈은 빛을 베껴서 가을 장미의 말들을 가둬두었다
그 안에 서서 너를 자꾸 베끼던 사랑은 누구인가
그 안에 서서 나를 자꾸 베끼는 불가능은 누구인가

-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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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사랑을 위하여/문정희(1947~ )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삶은 순전히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시인이 있고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
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

시는 언제나 천 도의 불에 연도된 칼이어야 할까?
사랑도 그렇게 깊은 것일까?
손톱이 빠지도록 파보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수심을 보지 못했다

시 속에는 꽝꽝한 상처뿐이었고
사랑에도 독이 있어
한철 후면 어김없이
까맣게 시든 꽃만 거기 있었다

나도 이제 농담처럼
가볍게 사랑을 보내고 싶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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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 김승동

허허 그리운가, 잊어버리게
여름날 서쪽 하늘에 잠시 왔다 가는 무지개인 것을
그 고운 빛깔에 눈멀어 상심한 이 지천인 것을

미움 말인가
따뜻한 눈길로 안아주게, 
어차피 누가 가져가도 다 가져갈 사랑
좀 나눠주면 어떤가

그렇게 아쉬운가, 놓아버리게
붙들고 있으면 하나일 뿐, 
놓고 나면 전부 그대 것이 아닌가
세상의 그립고 밉고 아쉬운 것들 그게 다 무엇인가

사랑채에 달빛 드는 날
묵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잔이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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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이기철(1943~ )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 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시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2000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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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여름가을겨울/이설야(1968- )

봄여름가을겨을
다시 겨울
겨울은 손목이 가는 눈발

지난 겨울은 잘 있습니다 
그때 내린 눈은 아직 다 녹지 못한 채
올해는 올해의 눈이 내립니다

우리는 흩뿌려진 눈처럼
몇년째 만나지 못했습니다
역병은 거리의 불빛을 모두 잠재우고
햇빛도 모두 먹어치웠습니다

눈송이들은 눈송이들과 함께 흩어지면서 
하염없이 내립니다
내리는 눈이 하나로 뭉쳐진다면
땅은 커다란 눈사람
하늘은 거대한 빙하
나는 보이지 않는 눈송이

밤 속에서 밤이
밤을 다시 얼리고 갑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겨울
겨울은 봄을 만듭니다 
봄은 나비를 만들고
나비는 숲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일년 내내 슬픔은 슬픔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오늘의 마음을 다 쓰겠습니다

- 시집,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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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봄/나태주

겨울을 이겨야 봄이지요
여전히 살아 있는 목숨이어야 봄이지요
그러니 봄이 기적이 아닌가요

새로 꽃이 피어야 봄이지요
새로 잎이 나고 새가 울어야 봄이지요
그러니 봄이 더욱 기적이 아닌가요.

<나태주ㆍ윤문영 시화집, '선물'(2014) 중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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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는 봄/임영조(1945~2003)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엔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따 잡아챕니다
파랗게 질려 난처하신 하느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마을 온통 웃음소리 낭자합니다
들불 같은 소문까지 세상에 번져
바야흐로 낯뜨거운 시절입니다
누구 짓일까, 거명해서 무엇하지만
맨 처음 발설한 건 매화년이고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이 덩달아
희희낙락 나불댄 게 아니겠어요
싹수 노란 민들레가 망보는 뒤꼍
자꾸만 수상쩍어 가보니 이런!
겂 없이 멋대로 발랑 까진 십대들
냉이 꽃다지 제비꽃 환하더군요
몰래 숨어 꼬나문 담뱃불처럼
참 발칙하고 앙증맞은 시절입니다
나로서는 대책 없는 봄날입니다.

- 시집, '시인의 모자', 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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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봄 삼월/김소월(1902~1934)    

가는 봄 삼월, 삼월은 삼짇
강남 제비도 안 잊고 왔는데,
아무렴은요
설게 이 때는 못 잊게, 그리워.
잊으시기야, 했으랴, 하마 어느새,
님 부르는 꾀꼬리 소리.
울고 싶은 바람은 점도록 부는데
설리도 이 때는
가는 봄 삼월, 삼월은 삼짇
                  <1922, 開闢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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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아침/김영랑(1903~1950)

비 개인 5월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즈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만은

이 아침 새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그 보금자리에 찌찌찌 소리내는 잘새의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 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創空을 흔드오
자랑찬 새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 버렸대서야
불혹不惑이 자랑이 아니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魂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익靜謚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少年인가 보오
새벽 두견이야 오~랜 中年이고
내사 不惑을 자랑튼 사람

- 김영랑 시집-허윤회 주해, 깊은샘, 2007

——

6월 / 김용택 

하루 종일
당신 생각으로
6월의 나뭇잎에 바람이 불고
하루해가 갑니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마음을
주저앉힐 수가 없습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오래오래 어딘가를 보고
있곤 합니다.

느닷없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당신 생각이었음을 압니다.

하루 종일
당신 생각으로
6월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해가 갑니다.

————

7월의 시/이해인 수녀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렐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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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허연(1966~  )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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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황규관(1968~ )

바람에 흔들리는 8월의 숲은
처음 보는 여자의 머릿단 같다
이건 물론 내 느낌일 뿐이지만
언젠가 모르게 내면이 되어버린
사건 없이, 뜨거운 태양이 있겠는가
사소한 몸살도 당신과 마주친 흔적이었다
쓰나미 이후에 남은 문명의 쓰레기가
우리를 어지럽게 할 때
그건 우리가 거품을 마시고 셈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해왔기 때문
어젯밤 얼굴을 붉히며 웃던
매끄러운 허벅지의 틈새에서
더더욱 믿음이 단단해졌다
그러니까 사랑은, 8월의 숲처럼
바람에 빠짐없이 소스라칠 것!
이렇게 나는 나이를 먹고
눈물을 다시 배운다
왜냐면 오늘은 처서 전날이고
후회는 현재를 더럽히므로

- 시집,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실천문학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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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아침/김수영(1921~1968)


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 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후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統覺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 간다​
뜨거워질 햇살이 산 위를 걸어 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위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사容赦*(용서하여 놓아 준다는 뜻)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여​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내려 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자​

여름 아침에는 
자비로운 하늘이 무수한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리라​
단 한 장의 사진을 찍으리라
                                           <1956>

ㅡThe essential 6, '#金洙暎', 민음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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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김수영(1921~1968) 

地上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소음도 번쩍인다 
여름은 이래서 좋고 여름밤은 
이래서 더욱 좋다 

소음에 시달린 마당 한구석에 
철 늦게 핀 여름 장미의 흰 구름
소나기가 지나고 바람이 불듯 
하더니 또 안 불고 
소음은 더욱 번성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다 남은 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던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기 전날 
우리는 언제나 소음의 二층 

땅의 二층이 하늘인 것처럼 
이렇게 人情의 하늘이 가까워진
일이 없다 남을 불쌍히 생각함은 나를 불쌍히 생각함이라 
나와 또 나의 아들까지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다 남은 날
땅에만 소음이 있는 줄 알았더니
하늘에도 천둥이, 우리의 귀가
들을 수 없는 더 큰 천둥이 있는 줄 
알았다 그것이 먼저 있는 줄 알았다 

地上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도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ㅡThe essential 6, '#金洙暎', 민음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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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잠/金南祚(1927~2023)


네 이름에 이어진 건
여기 잠들어라
가을의 가슴 안에 쉬어라

죽을 뻔 죽을 뻔
그쯤이나 하다가
얼마 헐거워진 너를 풀어 뉘이련다
자거라 자거라 잠의 노래 부르리라

가을이 이렇게 큰 몸인 줄
내 몰랐어라
온 누리 복되고 위안인 줄
내 몰랐어라

네 마음에 이어진 건
모두 잠들어라
어머니의 품이니 쉬어라

아흔아홉 가파른 고개
너를 등에 지고 온
여윈 빈 지게 비스듬히 세워 두고
나도 잠들어 쉬련다
쉬련다

사랑이여

ㅡ김남조, '가슴들아 쉬자', 시인생각,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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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 조태일

단풍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제 몸처럼 뜨거운 노을을 가리키고 있네.

도대체 무슨 사연이냐고 묻는 나에게
단풍들은 대답하네
이런 것이 삶이라고,

그냥 이렇게 화르르 사는 일이 삶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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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윤동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리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

추일서정秋日抒情/ 김광균(1914~1993)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트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急行車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을로 황량荒涼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風景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 시선집, '詩의 풍경', 김영종ㆍ영자ㆍ은영 엮음, 초이스북,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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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 이흔복(1963~ ) 

고죽을 향한 홍랑의 일편심 사랑이 붉어서 가을은 달빛도 한층 높아만 갑니다. 

당신은 물로 만든 몸 당신은 벌써 오랫동안 진리보다는 애정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발 헛디딘 나 사랑에 아팠습니다. 

사랑을 사랑했던 자신에게만 들키고 싶은 낯선 시간 저 아래 저 아래로 흘러흘러 나 스스로 어디에서 몽리청춘 (夢裏靑春)을 닫고 있을지요?

당신은 내게 꿈이 되어 준 한 사람. 나를 백 번 용서하고 천 번 길을 헤매는 동안 꿈을 이어주는, 

산울림엔 산울림으로 답하는 당신의 가을 깊은 산에 가고 싶습니다.

간밤에는 바람 냉정하고 상강 물소리 좋은 이 고마움 당신 다 가져도 좋습니다.

-시집, '내 생에 아름다운 봄날'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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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落果/정호승(1950~ )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햇빛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내가 지상에 떨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에 대하여
견딜 수 없었던
폭풍우의 폭력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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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落水/ 정호승

절벽 끝에 떨어지는 폭포는 아니다
절벽 끝에 부서지는 파도도 아니다
해 뜨기 전부터 풀잎에 맺혀
나를 기다리는 아침 이슬도 아니다

가을비 오는 날
낡은 아파트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늦가을의 눈물이다
바쁘나 내가 니하고 이야기 좀 하고 싶다
그런데 니가 너무 바빠서
말끝을 흐리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늙은 눈물이다

아버지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러 바쁘게
세상을 돌아다니는 동안
흙이 된 아버지 앞에 떨구는 
내 참회의 때늦은 눈물이다

- 정호승(1950~ )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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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가을 바람에" / 이해인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 이더라...

차창 바람 서늘해
가을인가 했더니
그리움 이더라...

그리움 이 녀석
와락 안았더니
눈물 이더라...

세월 안고
그리움의 눈물 흘렸더니
아~ 빛났던 사랑 이더라...

——

가을의 말/ 최하림(1939~2010) 
 
마른 볏잎도 볏잎으로 남아 있지 못하고
베어진 논두렁에서 달빛이 남아 뒤를
따르고 
달빛이 남아 뒤를 따르고 달빛이
남아 길잃은 사나이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그렇게 그 사나이가 가고 또 다른 사나이가
올지라도 마찬가지로 달빛은 따라가고 있다

아아 이토록 한없는 달빛과 사나이의 관계여
개선하고 유지하라 개선하고 유지하라

바람은 점점 멀어가고 그리고 그대 가는 길의
밤도 멀고 기다림이 사나이를 머뭇거리게 할지라도
걸어가라 일정은 끝나간다 가난한 자의

달빛이 이렇게 끝나간다

시선집,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생각의나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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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신경림(1936~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1956ㆍ문학예술>

- 시집, '農舞', 창비,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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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노래/김용택(1948~ )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납니다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로움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스칩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 시집, '그대, 거침없는 사랑', 푸른숲',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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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월 / 나희덕(1966~ )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ㅡ시집, '뿌리에게', 창비,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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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의 노래/ 이상국(1946~  )

십일월은 가을의 식민지,
무능한 정부는 늦게 온 꽃들마저 시들게 하고
돼지감자를 살찌운다

망명지의 커피집
문짝에 적힌 대로 전화를 하고 한참 기다리자
주인은 어디선가 늙은 차를 몰고 온다
식민지에는 마약이 따로 없다

날이 차고 무는 바람이 든다
나도 나에 대하여 할 만큼 했으므로
소설小雪 지나 한 날 송창식이나 부르며
내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제국의 햇빛은 보드까처럼 희고
산천은 벌써 기가 죽었다
그때야 그랬다 하더라도 누가
저 산그늘 속의 버섯이나
풀잎들의 노래를 기억이나 하겠는가

그래도 날마다 가을이다
당국의 허가도 없이 식민지 시인들아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쓰러지는 꽃들을 위로하지 마라,
이렇게 불온한 시절도 가고 나면 그만이나

십일월이여
나는 아직 더 갈 데가 있다

ㅡ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창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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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숲에서/이재무(1958~ )                               

겨울나무들의 까칠한 맨살을 통해
보았다, 침묵의 두 얼굴을
침묵은 참 많은 수다와 잡담을 품고서
견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겨울숲은 가늠할 수 없는 긴장으로 충만하다
산 이곳저곳 웅크린 두꺼운 침묵,
봄이 되면 나무들 가지 밖으로
저 침묵의 잎들 우르르 몰려나올 것이다
봄비를 맞은 그 잎들 뻥긋뻥긋,
입을 떼기 시작하리라
나는 보았다
너무 많은 말들 품고 있느라
수척해진
겨울숲의 검은 침묵을

- 시집, '저녁 6시', 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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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시  / 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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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김남조

새해 와서 앉으라고
의자를 비워주고 떠나는
허리 아픈 섣달 그믐날을
당신이라 부르련다

제야의 고갯마루에서
당신이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길
뚫어서 구멍내는 눈짓으로
나는 바라봐야겠어

세상은
새해맞이 흥분으로 출렁이는데
당신은 눈 침침, 귀도 멍멍하니
나와 잘 어울리는
내 사랑 어찌 아니겠는가

마지막이란
심오한 사상이다

누구라도 그의 생의
섣달 그믐날을 향해 달려가거늘
이야말로 평등의 완성이다

조금 남은 시간을
사금처럼 귀하게 나누어주고
여윈 몸 훠이훠이 가고 있는 당신은
가장 정직한 청빈이다

하여 나는
가난한 예배를 바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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