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진정한 1등 키우려면(2010.3.12)
중견기업의 CEO는 목소리를 높이며 흥분했다. 김연아의 환상적인 연기를 다시 화제로 삼던 중이었다. 모태범과 이상화, 이승훈 등 빙속 3인방의 당당함을 칭찬한 후였다.
그는 갑자기 "진정한 1등 대접을 받으려면 기업들이 스포츠 선수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더니 화살을 언론에 겨눴다.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신문이라면 `재계 순위`를 매기는 구태의연한 행태에서 제발 벗어나라고 그는 쏘아붙였다.
얘기는 이렇다. 신문이나 방송이 대기업 그룹을 자산 규모라는 잣대로 줄세우니 그걸 의식해 외형 키우기에 혈안이라는 거다.
자산 규모로 대기업 그룹의 순서를 매기는 일은 공정거래위원회의 몫이다. 상호출자나 채무보증 제한을 위해 기업집단을 분류해 소속 회사와 규모를 가리고 있다. 과거에는 30대 대기업집단만 뽑았지만 이젠 범위를 더 넓히고 있다.
이달 초 공정위가 내놓은 `기업집단 현황`에 따르면 1위 삼성, 4위 현대차, 5위 SK, 6위 LG, 7위 포스코, 8위 롯데, 10위 현대중공업, 11위 GS, 12위 금호아시아나, 13위 한진 이런 순서다. 중간에 건너 뛴 자리에는 2위 한전, 3위 토지주택공사, 9위 도로공사 등이 끼어 있다.
오랫동안 10대 그룹 밖에서 맴돌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로 앞자리를 차지하며 어깨에 힘을 잔뜩 넣었다. 2007년 4월 공정위가 발표한 순위를 보면 금호아시아나는 전년 11위에서 4계단이나 뛰어 7위로 올라섰다. 경쟁 상대들이었던 한진, 두산, 한화를 단숨에 제쳐버렸다.
하지만 외형 부풀리기로 재계 순위를 끌어올렸다고 좋아하던 금호는 무리한 시도의 후유증으로 그룹 자체가 벼랑 끝에 내몰렸다. 대우건설 인수로 차입금을 늘리는 바람에 그룹 순차입금이 매출액의 70%에 달할 정도로 급증하면서 재무구조가 악화됐다. 결국 주력 계열사에 대해 워크아웃을 신청했고 오너 일가는 경영에서 손을 떼는 지경까지 갔다.
금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재계 순위를 의식하다보면 이렇게 기업들로 하여금 딴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자산에는 부채도 포함된다. 차입금 늘려 자산이라는 기업 외형만 키운 뒤 상위 그룹으로 진입해본들 금호 같은 처지로 몰리면 무슨 소용이 있나.
앞에서 문제를 제기한 중견기업 CEO의 불만은 사실 딴 데 있었다.
삼성이 계열사를 앞세워 음식 사업에 열을 올리고, 현대차는 관계사 푸드서비스 업체에 구내식당 사업을 맡기는 구시대적인 행태를 여전히 하고 있는데 중소기업, 중견기업들이 어떻게 커나가겠느냐는 하소연이었다.
삼성SDS나 LG CNS가 그룹 내 전산관리 업무를 쓸어가는 한 관련 중소기업들이 한국의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가져갈 몫은 뻔하다고 그는 푸념했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들의 문어발식 계열사 확장에 본능적으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귀 아프게 들어왔던 옛 얘기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그대로였다. 국내 최대 통신업체 KT의 계열사가 커피판매 사업을 한다는 뉴스까지 나왔다.
`피겨 여왕` 김연아는 세계 1등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열광했다. 1등 선수의 연기 하나하나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고 찬사를 보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1300억달러 매출에 100억달러의 이익을 남겼다고 발표하자 국민들이 박수를 보낸 건 IT 분야 세계 1등으로 올라섰기 때문이었다. 이에 화답하려면 삼성은 주력기업 삼성전자를 진정한 세계 1등으로 유지하는데 그룹의 총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중소기업들에 넘기는 게 나은 분야라면 과감히 정리하는 결단도 필요하다.
분야마다 진정한 1등을 키워야 한다. 반도체에서 1등이 삼성전자라면, 자동차에서 1등은 현대차가 차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모든 역량을 각자 1등 목표로 세운 분야에 집중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 원칙이다.
[윤경호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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