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초 청와대 취재 비망록 3
<노대통령의 역사 인식과 개혁 추진론 >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들어 몇차례의 신년 인사회때 조선시대 역사 얘기를 부쩍 많이 꺼냈다. 세종과 정조 시대의 개혁이 당대에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는 얘기나, 조선조 초기 기틀을 잡았던 정도전의 개혁을 비교하며 설명하곤 했다.
사실 노대통령이 조선조 역사 얘기를 처음 꺼낸 것은 지난 2005년 12월 28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송년 만찬자리에서였다.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된 대통령의 그날 연설은 무려 40분간 이어졌고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의 역사에서 얻는 고민을 던졌다.
역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때는 우리가 완결된 사상과 제도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끊임없이 어떤 이념적 틀 속에서 사상, 정치제도, 국가제도 등에 몰두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사상체계가 생기고부터 아직도 민주주의가 어디로 진화하게 될지 그것은 아직도 두고 봐야 될 일일 것입니다.
또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고 얘기를 했는데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면 세종대왕 이후의 시대는 현저히 달라졌어야 하는데 국가나 제도, 사회, 문물, 문화 등이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한글이 대중적으로 채택됐다면 사회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대부 사회는 한글을 배척하고 세종 시대의 통치이념을 거의 거부했습니다. 세종의 통치이념이라는 것이 뚜렷하게 사상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종의 통치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지도자의 정신이 그 이후 사대부 사회와 조선 500년 동안 계속 거의 거부당했습니다. 거부당해서 세종대왕도 역사를 바꾸지는 못 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지난 조선 500년 역사에서 역사는 세종대왕에 의해서 바뀌지 않았고, 탕평책을 썼던 영조 정조 시대도 정조가 돌아가시는 그 해에 정조가 아끼고 사랑하면서 어떤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세력으로 키우려고 했던 세력이 일망타진돼 버렸습니다. 그것이 조선의 망국의 길까지 가버렸습니다.
가장 역사를 크게 바꾼 사람은 고려 말에 성리학을 가지고 불교에 기반한 귀족사회를 무너뜨리고 사회제도를 개혁하고 조선이라는 유교주의 사회를 세웠고, 사대부의 명분을 가지고 통치이념으로 세워내면서 혁명을 단행했던 정도전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경우는 아주 이례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그 시대에 영웅이 딱 떨어져서 그런 역사적인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정도전보다 열 배 가는 영웅이 있어도 그 시기적 상황이 그렇게 맞지 않으면 그것은 영웅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저도 아직 고민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 가지를 놓고 그 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번 찾아서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에 따라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1월 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렸던 정당,사회단체, 정부 부처 등의 신년 인사회에서는 개혁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며 다시 또 세종대왕 시대의 예를 꺼냈다.
세종대왕께서 조세제도를 재편하기로 하고 ‘연분 9등법·전분 6등법’ 제도를 과거시험 문제로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땅을 많이 가진 재상·판서들이 모두 반대를 해서 시행을 못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종 9년에 시험을 낸지 약 15년 뒤에 다시 어전회의에 공법제도 개혁안을 상정을 했는데 또 반대가 심해 못 했습니다. 이에 16년 지난 세종 25년에 또 다시 이 제안을 내놓습니다. 16년 뒤에 다시 말씀하신 것 보면 16년 내내 하고 싶었던 일 아니겠습니까.
그때 또 반대하니까 컴퓨터도 없는 시대에 약 17만호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해서 100만명이 ‘찬성’한다는 결과를 얻어 세종 26년에 이 제도를 시행했는데 그것도 바로 시행한 것이 아니고 여러 해에 걸쳐서 했다고 합니다. 그만두신 이정우 위원장 말씀에 의하면 시행하는 데 10년이 걸렸다는데 시행하고부터 10년 걸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전제군주 시대에도 제도 하나를 만드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는데 지금 풍수해 방지 및 복구 제도 만드는 데 몇 년 걸리는 것은 참 빠른 것입니다. 방사선 폐기물 처리장이나 부동산 제도는 어찌 보면 빠르다 싶고 문제가 시작된 때부터 생각하면 이 만큼 오는 데 수십년이 걸렸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동법이라는 것을 선조 때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경기 일원 지역에서는 진작 시행이 됐고 전국으로 확대하는데 결국 100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조선이란 나라가 그 뒤에 끝이 나빴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고 ‘개혁이라는 것이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노대통령은 당장 성과를 거두기 힘들더라도 나중에 역사에서 평가를 받으면 개혁은 성공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뉘앙스를 여러차례 비쳤다. 지난 2005년 10월 30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북악산 등산후 가진 간담회에서 노대통령은 캐나다의 멀로니 총리를 예로 들었다.
'마틴 브라이언 멀로니(Martin Brian Mulroney)'는 1939년 3월 캐나다 퀘벡에서 태어났다. 전기기사의 아들이었다. 65년에 노동변호사로 나섰다. 76년에 진보보수당(보수당) 총재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뒤 83년 보수당의 당수가 되었다.
이듬해 총선에서 보수당이 자유당을 압도했다. 멀로니는 총리가 되었다. 88년 총선에서 169석을 얻었다. 그는 과반의 힘으로 '연방부가세‘ 도입을 추진했다. 제조업에만 부과된 세금을 모든 업종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국민과 야당은 반발했다. 하지만 재정적자 해소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호소했다. 91년 법안이 통과됐다.
멀어진 민심은 93년 총선에서 보수당에 겨우 2석만을 허락했다. 자유당은 '부가세 철폐' 공약으로 압승하면서 집권했다. 그러나 자유당의 장 크레티앙 총리는 집권 후 부가세 철폐를 미뤘다. 아예 공약 자체를 폐기했다. 그 역시 재정적자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이유였다.
97년 캐나다 재정은 마침내 흑자로 돌아섰다. 멀로니의 과실을 크레티앙이 따먹은 셈이다.
멀로니의 정책 선택으로 보수당은 초토화됐다. 자유당은 부가세를 유지함으로써 장기집권 하게됐다.
멀로니는 당을 깨고 캐나다를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과 관계를 재정립하려거나 새로운 구상을 하려는 것은 이처럼 당이 깨질수도 있는 정책을 내놓지 않을까 하는 관측과 연결된다. 열린우리당이 노대통령과 관계를 결국 정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거나 여당의 지위를 상실하지 않겠느냐며 노심초사 했던 것은 이런데도 연유가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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